김종훈 미국 벨연구소 사장(46)이 세계 최고 연구소 벨랩(Bell Labs)의 80년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1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순수 과학기술 개발에 주력했던 벨연구소를 실용기술 개발의 '메카'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2일 작년 4월 취임한 김 사장이 계속된 구조조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벨연구소를 수익성 높은 상업기술 개발 센터로 바꿔놓기 위해 구조 개혁의 고삐를 죄고 있다고 보도했다.

벨연구소는 트랜지스터 태양전지 레이저광선 통신위성 등 인류 문명에 획을 그은 기술의 산실이었지만 1996년 모회사인 루슨트테크놀로지가 AT&T에서 분사된 이후 그 위세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정보기술(IT) 산업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한 2000년 이후에는 연구소 일부 매각,분사 등으로 연구원 수가 3000여명에서 1000여명으로 감소했을 정도이다.

루슨트테크놀러지와 프랑스 알카텔의 합병(오는 9월7일 주총 예정)을 앞두고 알카텔측 경영진이 연구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더욱 불안한 상황이다.

김 사장은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바로 사업화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스타급 연구원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8분 안에 요점을 설명할 수 있는 기술에 연구를 집중시키고 있다.

제휴 기업이나 벤처캐피털을 찾아 기술을 바로 제품화할 수 있도록 하고 정부 지원도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

김 사장은 연구원의 40%가 기초기술 개발에 매달려 있는 사업부문은 과감하게 정리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더블린과 베이징,인도 방갈로르 등에 연구분원을 설치,비용 절감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연구소에선 아직 생소한 '매트릭스 경영'(특정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 다른 분야 직원들을 한 팀에 규합시키는 경영방식)도 도입했다.

브레인스토밍 방식으로 연구원들의 아이디어를 쏟아내게 해 비디오게임에서부터 휴대폰 지불결제 시스템에 이르는 150개 아이디어를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는 기술 상용화 사업부를 설립해 이들 아이디어의 육성 가능성을 타진하게 했다.

김 사장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위해 연구소의 비전과 루슨트의 비전을 조율해야 할 때"라며 변화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작년 벨연구소 사장으로 복귀하면서 "모기업 루슨트에 결정적 기술을 제공하는 R&D 업계 리더로 바꿔나가겠다"는 다짐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혁신(innovation) 자체를 한번 더 혁신시켜야 한다"며 전 연구원들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월지는 벨연구소 연구원들도 김 사장의 이 같은 비전과 리더십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서 라미레스 연구원은 "과학기술을 돈으로 연결시키는 압박이 없었던 과거를 결코 그리워하지 않는다"며 "(김 사장의 비전은)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새로운 통로를 열어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 사장은 자신이 세운 유리시스템즈를 1998년 루슨트에 10억달러(약 1조원)에 매각해 미국 400대 갑부 반열에 올랐던 화제의 인물이기도 하다.

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