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경기 용인에 위치한 SK아카데미 대강의실.SK그룹 주요 계열사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태원 SK㈜ 회장은 "자신이 속한 계열사가 국내에서 매년 10%씩 10년 동안 성장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임원은 손을 들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100여명의 임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선뜻 손을 들지 못했다. 최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글로벌리티(Globality)'를 높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최 회장은 글로벌리티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이 '글로벌리티'라는 말을 처음으로 꺼낸 것은 지난해 10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다. 올해 신년사에서는 이를 새로운 경영화두로 개념화했다. 글로벌리티란 세계화 혹은 글로벌화의 정도,또는 글로벌 능력이란 뜻을 지닌 신조어다. 글로벌리티를 높인다는 것은 글로벌화를 더욱 확대한다는 의미,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더욱 높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 회장의 최근 언급에서 글로벌리티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SK그룹의 지난해 매출은 60조원에 달합니다. 그런데 SK그룹이 동유럽에서 1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해서 SK그룹의 글로벌리티가 높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해외 초일류 기업처럼 자국 내 매출보다 해외매출이 월등히 많아야 진정으로 글로벌리티가 높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너지와 정보통신을 주력사업으로 하는 SK그룹은 지금껏 매출의 대부분을 국내 내수시장에 의존했다.

그러나 협소한 내수시장에 안주해서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을 뿐더러 생존마저 위협당할 수 있다.

SK그룹은 수출 확대와 해외사업 강화 등 글로벌리티를 높이는 것만이 그룹의 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최 회장은 SK그룹의 글로벌리티를 높이기 위한 1차 전략으로 중국을 선택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적 발전은 한국에게 위협요인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반대로 세계 2대 시장으로 급부상한 이곳에서 생존과 성장의 동력을 찾는다면 중국은 오히려 기회의 나라가 되리라는 판단에서다.

"주변에서 왜 중국 중심의 글로벌리티를 강조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반드시 중국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중국은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깝고,거대한 시장을 가진 채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선 공략 대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미국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반드시 성공해야 진정한 글로벌 리딩 기업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SK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1차 교두보인 셈이다.

이 곳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미국 유럽 등 세계로 시장을 넓히겠다는 게 최 회장의 구상이다.

중국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최 회장은 또한 '차이나 인사이더(China Insider)'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차이나 인사이더란 SK가 중국에 들어온 외국기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중국기업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국 내에서 중국 리더 기업들이나 글로벌 메이저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수준의 역량을 갖추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최 회장은 글로벌리티를 화두로만 던지지 않고 직접 실천에 나서고 있다. 최 회장은 올해 들어 최근까지 모두 10회 해외출장을 다녀왔다. 전체 36박37일의 일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출장 횟수 및 일정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올해 1월 쿠웨이트와 스위스를 시작으로 매달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미국 영국 등지를 돌며 글로벌 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 회장의 상반기 해외 출장 가운데 중국 출장은 4회로 17박18일에 달한다.

중국 출장의 경우 횟수는 지난해와 비슷하지만 머무르는 날짜가 2배로 늘었다. 이는 중국 출장이 단순한 사업장 시찰이 아니라 현안을 직접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3일 최 회장은 중국 상하이 주재 임직원 격려 만찬을 시작으로 4박5일 동안 상하이,수저우,베이징 등 3500㎞에 달하는 강행군을 했다. 하루 약 700㎞를 이동한 셈이다.

주력 계열사인 SK㈜는 중국지주회사를 세워 수출 및 현지사업을 확대하고 있고 SK텔레콤도 차이나유니콤과 협력을 강화하는 등 중국시장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SK㈜의 해외자원개발,SK텔레콤의 미국 이동통신시장 진출,SK커뮤니케이션즈의 사이월드 6개국 개설,SK건설의 잇단 중동 플랜트 수주 등 해외사업도 확대되고 있다.

글로벌리티를 높이겠다는 최 회장의 구상이 차근차근 가시화되고 있다.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


[ 최태원 회장의 글로벌리티 ]

⊙ "중국 시장은 더 이상 수출 시장이 아니라 내수 시장으로 봐야 한다."

-2005년 10월 중국 CEO 세미나

⊙ "중국 시장에 진출한다고 하면서 중국 신문은 보고 있는가. 중국 시장에서 무엇이 이슈인지 알려면 신문이라도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처럼 글로벌리티 제고는 아직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2006년 3월 신임 임원과의 대화

⊙ "해외 원정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해외에 투입된 전투병만이 아니라 모든 역량이 총동원돼야 한다. 마찬가지로 글로벌리티 제고는 해외사업부서만의 일이 아니라 국내 마케팅 등 국내사업 역량이 해외로 전달돼야 한다."

-2006년 3월 신임 임원과의 대화

⊙ "글로벌리티를 높이기 위해서는 해외시장 진출이나 투자,매출을 늘리는 것 외에도 언어,생활습관 등 문화적인 측면도 함께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2006년 6월 임원과의 대화

⊙ "중국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China Insider'(차이나 인사이더) 가 돼야 한다. China Insider란 중국 기업 리더들 또는 글로벌 메이저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으로서,중국 내에서 실현할 수 있는 글로벌리티의 최고 수준을 의미한다."

-2006년 7월호 사보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