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합의를 존중하겠다던 정부가 노사관계 법ㆍ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에 대한 입법예고를 앞두고 노사합의안을 거부,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일단 복수노조허용과 노조전임자임금지급금지 시행을 입법예고 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당초 재계와 한국노총이 합의한 복수노조허용과 노조전임자임금지급금지 등 2개 핵심조항의 5년유예를 수용할 뜻을 비쳤었다. 열린우리당도 정부와 마찬가지로 노사합의에 대해 애써 반대할 이유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노사로드맵 작성에 참여했던 학자들과 여론 등에서 이미 두 차례나 유보해왔던 조항을 또다시 늦추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일고 있고 민주노총에서도 반대입장이 거세지자 결국 정부와 여당 모두 '5년 유예' 수용 방침에서 시행 강행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버렸다. 이 때문에 2개 핵심조항에 대한 시행유보를 합의했던 한국노총과 재계는 정부의 입장선회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노사가 5년간 유예키로 합의한 것에 대해 정부 여당이 여론을 의식해 수용을 주저하고 있다"며 "정부는 명분에 집착하는 자세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총도 "학자들을 중심으로 5년 유예안을 반대하는 것은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며 "현실을 인식한다면 복수노조 등을 강행하도록 부추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입법예고 때 복수노조허용과 노조전임자임금지급금지에 따른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포함시킬 방침이다. 전임자임금의 경우 급여지원을 금지하되 법령에서 예외적으로 사업장 규모에 따라 급여를 차등지원할 수 있도록 인원을 정한다는 방침이다. 또 복수노조의 경우 노사가 자율적으로 교섭창구를 단일화하도록 하고 합의를 못할 경우 과반수 득표노조에 교섭권을 주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나 정치권은 현재 노사합의안에 대해 상당한 미련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국제노동기구(ILO)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등 국제기구에서 한국 정부에 결사의 자유를 들먹이며 복수노조 허용을 권고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노동현실로 볼때 복수노조 허용은 큰 도박이나 마찬가지다. 노사합의를 완전히 무시한 채 복수노조허용 등을 시행했다가 자칫 잘못하다간 노동현장이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노동부는 우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부는 일단 입법예고안에는 복수노조와 노조전임자임금지급금지안을 명문화시킨 뒤 의견수렴 과정에서 정치권이 나서 5년유예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럴 경우 한국노총이나 재계는 노사합의정신을 수용할 것을 정부나 정치권에 강력히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노사로드맵에 참여했던 학자들도 노사합의안에 대해 반대입장이지만 6일 이상수 장관과의 오찬 간담회에서는 5년 유예 대신 3년 유예안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등 다소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가 핵심조항에 대한 시행방안을 입법예고하더라도 뒤집힐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다.

사실 노동부는 한국노총과 재계가 5년유예 카드를 너무 일찍 꺼내든 것을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 정부가 2개 핵심조항에 대한 시행방안을 입법예고한 뒤 노사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줄다리기 하는 모습을 보인 뒤 극적으로 합의안을 내놓았더라면 이처럼 여론의 비난이 심하진 않았을 것이란 지적이다.

학자들이 노사합의안에 대해 비판적으로 나오는 것은 노동개혁을 훼손한다는 우려도 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발표함으로써 허를 찔린데 대한 반발작용도 있다는 분석이다.

학자들은 경제 현실보다는 원칙을 중시하는 측면이 강하지만 복수노조 허용으로 노동현장에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재계와 마찬가지로 원치 않고 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