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역 아파트 골조 시공업체인 A사는 최근 모 건설회사로부터 받아야 할 공사비 100억원 가운데 15억원을 미분양 아파트 5채로 대신 받았다.

이른바 '대물 결제'다.

아파트는 분양가보다 2000만원 낮은 3억원씩으로 6% 이상 할인한 가격으로 거래됐다.

주택경기 침체가 심각한 부산 대구 등에서 미분양 아파트의 대물 결제가 성행하고 있다.

이는 건설회사(시행사·시공사)가 하청업체인 전문 건설업체나 분양 대행사 등을 상대로 현금 대신 미분양 아파트로 대금을 대납하는 것으로 과거 외환위기 때와 같은 부동산 시장 침체기에나 간혹 등장했던 편법 거래다.

전문가들은 건설업체에는 '최후의 수단' 격인 아파트 대물 결제가 다시 등장했다는 것은 지방 건설업체들의 경영난이 비상 상태임을 보여주는 신호라며 하청업체와 소비자 등의 2차 피해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정관신도시·명지지구 등 부산권을 비롯해 대구 울산 김해 충주 등 아파트 계약률이 낮은 지방 도시에서 대물 결제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미분양 아파트 적체로 고심하고 있는 지방 중소 건설업체들은 하도급 대금을 대납하는 동시에 미분양 물량을 털어낼 수 있다는 점에 자극받아 대물 결제로 눈을 돌리는 추세다.

대물 결제를 이용하면 그만큼 은행권에서 중도금 대출을 추가로 받아낼 수 있는 데다 공사비로 전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해당 건설사는 물론 하청업체들도 모두 쉬쉬해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을 뿐 계약률이 낮은 단지는 사실상 모두 대물 결제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면서 "자금난이 심한 일부 업체의 경우 전체 아파트 분양 물량의 15%를 대물 결제로 이용한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대물 아파트를 떠안은 하도급업체들은 계약 후 최소한 1년이 지나야 분양권을 전매하는 방식으로 현금화가 가능해 자금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공사를 발주한 건설회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어 "공사비를 떼이는 것보다 낫다"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하도급업체 입장에서 보면 대물 아파트는 사실상 1~2년짜리 어음이나 마찬가지"라며 "심지어 착공 2~3년 후 아파트 입주 때 등기 업무를 대행하는 법무사에게까지 미분양 아파트로 대물 결제하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대물 아파트는 건설업체가 동원할 수 있는 사실상 최후의 수단"이라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소비자들이 이들 대물 아파트를 매입하는 경우 건설회사가 부도로 쓰러지면 분양대금을 전혀 보호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2차 피해까지 우려되고 있다.

대법원이 1999년 "자재비나 공사비 대신 받은 아파트는 보증 이행 책임이 없다"고 판결,대물 아파트는 분양 보증 대상에서 제외돼 있는 상태다.

대한주택보증 관계자는 "분양권을 사려는 소비자들은 계약금·중도금 납부 대장이나 입금통장 등을 반드시 확인한 뒤에 계약을 맺어야 부도 등의 사태 때 분양대금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황식 기자 his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