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 소설가 >

며칠 전 함께 서울에 올라와 있는 초등학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서울 대형서점에 근무하는 친구인데 다음 주에 우리가 나온 시골 초등학교 아이들이 서울구경을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초등학교를 나온 선배 작가로서 최근 내가 쓴 동화책에 사인을 해 아이들에게 한 권씩 전하면 좋지 않겠냐고 했다. 그래서 친구가 근무하는 서점으로 나가 60권의 책에 일일이 사인을 하고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그 친구가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없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

"참,너는 이번 토요일에 안 내려가냐?"

아마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 같으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이 질문이 뜬금없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의 뜻을 바로 파악했다. 그것은 그냥 고향에 한번 내려가지 않느냐는 뜻이 아니라 벌초를 하러 가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러잖아도 며칠 전부터 그 일로 마음이 무거워 있던 차였다. 성묘(省墓)를 하든 벌초를 하든 우리 형제가 관리하고 둘러보아야 할 산소는 이곳저곳에 열 개도 넘는데 넷이나 되는 형제들은 모두 객지에 나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늙으신 아버지가 장조카와 함께 예초기를 들고 이산 저산을 다니신다고 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니 친구집 사정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예전 어릴 때엔 추석날의 성묘도 그랬지만 추석 한 달 전쯤에 하는 벌초 역시 온 집안의 가을 야유회와도 같은 풍경이었다. 일을 감독하시는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는 성묘를 나서는 것처럼 두루마기에 갓을 쓰시고 그 아래 대소가의 숙항(叔行) 어른들은 낫을 들고 아침 일찍 시제청(時祭廳) 마당에 모였다. 여남은 명이 넘는 벌초꾼이 어른들의 지시에 따라 이 산 저 산의 산소들을 분담한다.

예초기가 무엇인지도 몰라 순전히 낫으로 꼴을 베듯 산소 전역의 풀을 베던 시절인데도 일은 늘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끝이 났다. 그리고 다시 시제청에 모여 집안의 아주머니들이 아침부터 마련한 음식을 들며 산에서 따고 주워온 밤과 머루를 서로 나눈다. 정작 추석 때엔 일일이 다 얼굴을 볼 수 없던 집안의 아저씨들이 벌초하는 날만은 다들 어김없이 얼굴을 내밀곤 했다. 어릴 때는 그런 풍습과 풍경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로부터 불과 한 세대가 지났다. 그때는 아직 어려 낫 대신 갈퀴를 들고 어른들이 잘라놓은 풀을 산소 바깥으로 긁어내던 우리가 낫 대신 예초기를 들고 벌초를 나선다. 기계를 사용하는 만큼 당연히 능률적이어야 할 텐데 사정은 오히려 반대다. 예전 여남은 명이 모이던 벌초꾼이 이제 서너 명도 채 되지 않은 제 형제들도 다 모이기 어렵다. 벌초를 다니다 보면 형편이 모질어 몇 년째 제 부모의 산소도 찾아보지 못하는 몇몇 친척들의 사정도 눈에 집힌다. 산소에 무성하게 자란 풀뿐만 아니라 어느 결에 밀고 들어온 관목과 칡덩굴이 저간의 사정을 다 말해준다.

친구는 우리 어린 시절의 벌초 풍경은 그 시절의 일대로 아름답게 추억의 장으로 넘겨두고 이제 우리는 우리대로 장례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일에 대해 앞선 생각이나 남다른 생각을 가져서가 아니라 결혼을 해 어른이 된 다음 20년 넘게 벌초를 다니다 보니 앞으로 이 일이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이어질 일 같지 않더라고 했다.

친구는 당장 우리 어릴 때와 지금이 다른데 벌초가 무언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땐 온 천지의 산소들이 다 묵지 않겠느냐고 했다. 벌초야말로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 묻힌 다음에까지도 후손들의 보살핌을 받던 농경사회 속의 아름다운 풍습인데 지금은 정신적 압박의 한 요소가 되었다고 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친구와 같은 생각이었다. 후손들이 쓸 국토의 보존을 위해서만 장례문화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현실의 문제로 그것은 더욱 빠르게 바뀌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직은 어린 시절 일가의 어른들이 가졌던 경건한 나의 의무처럼 이 아침 벌초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