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동 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 현대자동차 계열사의 채무탕감을 위해 금품 로비를 벌인 혐의로 기소된 김동훈 전 안건회계법인 대표,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박상배 전 산업은행 부총재 등이 푸른색 수의를 입고 법정에 들어섰다. 피고인들이 김동훈씨로부터 돈가방을 건네받았다는 검찰주장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비공개로 마련된 검증작업을 위해서였다.

이날 증인석에 선 것은 뇌물전달 도구로 쓰였다는 가방들. 검찰은 압수했거나 김씨 진술과 유사한 007가방 및 쌤소나이트가방 등 3개를 들고 왔고 변호인단 역시 별도의 가방을 마련했다. 검증 과정에서 확인된 현금 2억5000만원의 무게는 29.5kg. 이종석 형사합의21부 부장판사가 "이 돈을 한번 이동시켜보라"고 주문했고,옆에 서있던 박 전 부총재는 가방을 끄는 시늉을 했다.

현금 2억5000만원이 든 더플백을 4차례,2억원 더플백 1차례 등 총 14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박 전 부총재는 그러나 "다리를 다쳐 목발을 하고 무거운 더플백을 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종전 주장을 되풀이 했다. 이날 법정에선 검찰이 가져온 쌤소나이트 가방에는 5000만원 돈다발을 넣은 뒤 가방이 제대로 닫혔지만 변호인단이 가져온 가방은 닫히지 않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미스터리는 가방뿐만이 아니다. 김씨가 받았다는 41억6000만원 중 15억3000만원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대검 중수부에 따르면 김씨는 현대차 계열사인 아주금속과 위아측으로부터 채무탕감건과 관련해 4억3000만원과 37억3000만원씩을 받은 뒤 수수료로 각 1억원과 5억원을 뺀 나머지를 로비자금으로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씨 진술로 확인된 뇌물총액은 박 전 부총재의 14억5000만원,변양호 전 국장 2억원 등 6명에게 준 20억3000만원이 전부다. 김씨는 "채권금융기관 관련 임직원에게 로비자금으로 전달했다"고만 진술할 뿐 구체적인 전달처를 밝히지 않고,대검 중수부도 묵묵부답이다. 변씨측 변호인은 '배달사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건의 본질인 범행현장에 들어가면 더 가관이다. 뇌물제공자와 수수혐의자가 "돈을 줬다" "받은 적 없다"며 180도 상반된 진실공방으로 맞서고 있다. 특히 변씨 변호인측과 검찰의 다툼은 재판부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가늠키 어렵다. 변씨가 돈을 받았다는 정황은 3차례. 2001년 7월12일 재경부 사무실에서의 전달 여부는 당시 국회모습을 찍은 비디오테이프까지 동원됐다. 하지만 "장관 뒷좌석에 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검찰과 "변씨의 좌석은 장관 뒤가 아니라 벽쪽 세로로 놓여진 자리"라는 변호인측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2001년 12월 하순과 2002년 4월 하순 돈 전달 부분에 대해서도 알리바이가 충돌하고 있다. 변씨 변호인은 당시 변씨와 김씨의 신용카드 사용내역 등을 알리바이 증거로 제시하며 두 사람 간 회동사실을 전면 부인한다. 이에 대해 김씨는 뇌물전달 장소인 일식집과 유흥주점의 이름,날짜를 심문 때마다 바꾸며 재판부를 혼란케 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결국 재판부는 변씨를 구속수감(6월14일)한 지 3개월이 지나도록 피고인들의 진실게임에 말려 사건의 실체를 벗기는 데 한발짝도 진전하지 못한 셈이다. 이날 가방검증과정 내내 법정을 지키고 있던 한 인사는 "이게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라며 혀를 찼다.

김병일·김현예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