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인력 구조조정을 할 때는 대개 오래 종사한 사람들부터 내보낸다.

인사나 조직운용에 숨통을 터주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인건비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웬덴은 거꾸로다.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 근로자들이 강력한 ‘스크럼’을 짜고 젊은 근로자들을 튕겨내 버린다.

30세와 60세 근로자 중 한 명을 내보내야할 상황이면 회사는 무조건 30세를 선택해야 한다.

스웨덴 최대의 정보기술(IT)기업인 에릭슨.이 회사는 한 달 전부터 임직원들로부터 희망퇴직 지원서를 받고 있다.

연봉의 1∼2년치를 얹어주고 다른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알선해주는 조건이다.

희망퇴직 목표선은 2000명.에릭슨측은 "조직 슬림화를 위한 구조조정 차원이 아니라 젊은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명 공과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스웨덴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시스타 사이언스'에서 경험을 쌓고 있는 신예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기존 직원들을 내보내겠다는 것이다.

◆ 젊은 피 수혈이 안 되는 이유

스웨덴의 고용법 및 노동관계법에 명시된 '후입선출(後入先出)'원칙과 고용규정을 알게 되면 에릭슨의 이 같은 고육책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고용법은 "사용자(회사)측이 경영상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정리해고를 단행할 때는 늦게 입사한 순서에 따라 시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리해고를 하려면 가장 늦게 입사한 신입사원부터 내보내야 한다.

이 원칙은 노동조합을 근간으로 탄생한 사민당 정권이 기존 조합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스웨덴의 공식 실업률은 올 8월 말 현재 5.7% 정도지만 청년 실업률이 무려 23%에 달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런 법규정이 작용하고 있다.

상시 구조조정체제를 갖추지 않고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현대적 경영환경에서 스웨덴 기업들은 인력 감축을 시도할 때마다 젊은 직원부터 내보내야 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스웨덴 기업들은 '젊은 피'를 제때 수혈받지 못해 무척 애를 먹고 있다.

웁살라 대학의 괘란 요한손 교수는 "산업구조 고도화로 '고용 없는 성장'시대가 도래하면서 갑자기 청년 노동시장에 빈 공간이 생겼다"며 "'후입선출' 원칙으로 몇 차례나 직장을 잃고 나오면 근로의욕이 줄어들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구조적 문제점 때문에 일찌감치 취업을 포기하고 실업수당에만 의존해 무위도식하는 청년들을 마냥 나무랄 수만은 없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에릭슨이 기존 직원들을 먼저 내보내려는 것은 젊은 인재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물갈이하겠다는 고육책으로 해석된다.

해외의 다른 IT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에릭슨으로서는 자국의 경직된 노동시장에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 무조건 65세까지 정년 보장


스웨덴은 또 노조와 근로자들의 권익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보장해주는 나라로 유명하다.

노사관계의 가장 큰 원칙은 '메드아르메타삼탈(Medarbetarsamtal)'이다.

우리말로 '같이 의논해서 결정한다'는 뜻이다.

고용 및 근로형태,생산량 등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내용을 노사가 함께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회사는 근로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한 임의로 해고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회사가 '후입선출'원칙을 지키지 않고 해고를 했다간 법원에 불려나가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줘야 한다.

따라서 일단 취업을 하면 무조건 정년(65세)까지 고용을 보장받는 구조다.

뿐만 아니라 1년 단위로 배정되는 휴가일수는 6주가 기본이다.

월급여의 80%가 나오는 병가를 적극 활용(?)해 두세 달씩 장기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물론 스웨덴의 이런 시스템을 한국적 틀에 넣어 일방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스웨덴이 세계 최고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배경에는 1938년 노사 간 대타협의 결실이었던 '잘츠훼보덴'협약이 있다.

이 협약으로 노사가 서로의 힘과 역할을 인정하고 협력적 노사관계를 구축한 것이 사회통합은 물론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됐다.

◆ 반시장적 노동정책 개선해야

하지만 이번 총선을 계기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얘기가 정가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누구에게나 정년을 65세까지 보장하고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반(反)시장적 노동정책으로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기업들 역시 경직 고용관행 때문에 무척 애를 먹고 있다.

지식집약적인 산업구조와 인프라 덕분에 아직도 외국인 투자가 활발한 편이지만 외국기업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강도는 갈수록 세지고 있는 분위기다.

스웨덴의 저명한 경영컨설턴트이자 '액티브오너파트너즈'의 회장을 맡고 있는 롤프 칼손은 "모든 경영시스템이 글로벌화되고 있는 환경 아래에서 노사가 제2의 대타협을 이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며 "특히 경영계는 반시장적인 고용제도를 혁파해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톡홀름(스웨덴)=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