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기행] ⑧ 성심수녀회 본부공동체 ‥ 거대한 화두 사복입었더니 더 잘 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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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제가 관구장 수녀입니다."
먼저 이렇게 인사를 해오지 않았다면 누가 수녀인지 못 알아볼 뻔했다.
서울 원효로 4가 성심여고 교정의 성당을 지나 성심기념관 뒤편에 있는 백합관 2층.성심수녀회 한국관구의 사무실인데 수녀복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들 사복 차림이다.
관구장 김숙희 수녀(48)도 줄무늬 셔츠 위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가 없다면 그냥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인상이다.
"사복 차림이 이상해 보이세요? 우리 수도원은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수도복 현대화 작업을 가장 먼저 시작해 몇 차례의 변화 끝에 1970년대 초부터 평복을 입기 시작했어요. 현대화된 수도원이지요."
성심수녀회는 18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1779~1865)가 3명의 동료 수녀들과 함께 설립한 수도회로 세계 43개국에서 36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성심수녀회는 특히 프랑스 혁명 직후의 혼란 속에서 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빛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한국에는 전쟁의 피해와 혼란이 채 수습되기도 전인 1956년 7명의 외국인 수녀들이 들어와 첫 공동체를 설립했고 이듬해부터 성심여중과 성심국제학교,유치원 등을 열어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이후 성심여고와 성심국민학교,성심여대(춘천)를 잇달아 열었고 봉천동 천막학교,야간 중·고교,공부방 등 제도권 안팎을 가리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우리가 평복을 입는 것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 한가운데서 살기 위함입니다.
수도복으로 인해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우리 자신도 세상 보는 눈을 새롭게 하자는 것이지요."
'하늘 아래 첫동네'로 불리는 강원도 고한 두문동 탄광촌에서 23년간 지속했던 무의촌 진료와 공부방,부천·부평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인권보호 및 노동쟁의 지원,인성계발 등을 돕는 노동사목,가출 청소년 쉼터와 공부방 역시 성심수녀회가 사랑을 전하는 활동들이다.
관구장 수녀의 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백발의 할머니 수녀 한 분이 들어선다.
성심수녀회의 최연장자이자 역사의 산 증인인 김재순 수녀(80)다.
김재순 수녀는 진명여고를 나와 미국 위스콘신대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수녀가 돼 1960년 귀국한 뒤 성심여대에 재직하며 총장을 지낸 인물.동생(김재숙)도 수녀이고,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 때 순직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그뿐이랴.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에 나오는 춘천 성심여자대학의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의 한 명이 바로 그다.
"주매분 수녀님이 학장,제가 교무처장을 맡고 있을 때인데 피천득 선생님에게 강의를 부탁하기 위해 댁으로 찾아갔던 일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왕복 4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마다않고 선생님께서 강의를 해주셨지요.
그런 인연이 정말로 수필 '인연'에 나올 줄은 몰랐지요."
수필 '인연'을 보면 선생이 열일곱살 때 처음 일본 도쿄에 가서 묵었던 미우라 선생 댁의 어린 딸 아사코가 성심여학원 소학교 1학년이었다.
'성심'이라는 인연이 선생으로 하여금 강의를 맡게 하고 또 수필 '인연'을 쓰게 한 것 아닐까.
"처음 귀국했을 때는 매일 석유램프를 닦아놓는 게 빼놓을 수 없는 일의 하나였어요.
전기가 자주 끊어지기 때문이었지요.
그때는 옛 용산신학교 자리에서 살았는데 숙소가 따로 없어 공동체방에서 야전침대를 놓고 잤어요.
학교 교무를 맡았을 땐 사무실이 곧 침실이었지요."
김재순 수녀는 "난방도 안 되고 물도 전기도 없었던 이곳에 자리잡은 이듬해 18명의 학생으로 여학교를 열었는데 지금은 여고 한 학년이 400여명이나 되니 많이 발전한 것"이라며 상념에 젖는다.
그는 "예전에는 중세 복장(수녀복)을 입고도 피구 농구 하키까지 했다"며 사복 생활의 장단점을 설명한다.
수녀복은 교황이나 임금을 만나든,고아원에 가든 그 하나면 족하지만 사복은 상대방에 장소,상황에 따라 맞게 갖춰 입어야 하니 불편한 점도 있다.
옷이며,머리,신발 등을 신경써야 하는 것도 번거롭다.
그러나 사복을 입고 있으면 신자들이 특별대우를 하려 들지 않아서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시장 가서 물건 값을 깎기도 좋아요.
상인들이 언니,아줌마,어머니,사모님 하고 부르면 '아,내 나이면 이런 역할을 하게 되는구나' 하고 현실감각을 갖게 되니 사복을 입는 은혜지요.
누가 '자녀가 몇이냐'고 물으면 '아들은 없고 딸은 많다'고 해요."
관구장 김숙희 수녀가 이렇게 설명하며 웃는다.
성심수녀회의 회원은 청원자를 포함해서 모두 69명.원효로에 있는 본부공동체와 성심공동체,학교 맞은편의 뒤셴공동체 등에서 30여명이 살고 나머지는 파주에 있는 피정의 집 '예수마음배움터'와 역곡 일대 쉼터 3곳 등에서 소규모 공동체를 이뤄 생활한다.
김숙희 수녀는 "세상이 아무리 밉고 죄가 많은 곳이라 해도 우리 역시 그 일부이며 구원해야 할 대상"이라면서 "세상은 우리의 큰 화두"라고 했다.
그래서 성심수녀회는 '전적으로 관상적이며,전적으로 사도적인 영성'을 특징으로 한다.
기도와 봉사라는 두 끈 모두 놓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수도원행을 결심하는 것은 삶에 대한 열정이 있고 세상에 대한 관심이 커야 가능한 일"이라며 "수도원에 들어온다는 것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신문도 많이 보고 세상을 향해 많이 열려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성심수녀회의 분위기는 밝고 경쾌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활기차게 교정을 누비는 성심의 여학생들처럼.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먼저 이렇게 인사를 해오지 않았다면 누가 수녀인지 못 알아볼 뻔했다.
서울 원효로 4가 성심여고 교정의 성당을 지나 성심기념관 뒤편에 있는 백합관 2층.성심수녀회 한국관구의 사무실인데 수녀복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들 사복 차림이다.
관구장 김숙희 수녀(48)도 줄무늬 셔츠 위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가 없다면 그냥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인상이다.
"사복 차림이 이상해 보이세요? 우리 수도원은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수도복 현대화 작업을 가장 먼저 시작해 몇 차례의 변화 끝에 1970년대 초부터 평복을 입기 시작했어요. 현대화된 수도원이지요."
성심수녀회는 18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1779~1865)가 3명의 동료 수녀들과 함께 설립한 수도회로 세계 43개국에서 36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성심수녀회는 특히 프랑스 혁명 직후의 혼란 속에서 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빛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한국에는 전쟁의 피해와 혼란이 채 수습되기도 전인 1956년 7명의 외국인 수녀들이 들어와 첫 공동체를 설립했고 이듬해부터 성심여중과 성심국제학교,유치원 등을 열어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이후 성심여고와 성심국민학교,성심여대(춘천)를 잇달아 열었고 봉천동 천막학교,야간 중·고교,공부방 등 제도권 안팎을 가리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우리가 평복을 입는 것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 한가운데서 살기 위함입니다.
수도복으로 인해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우리 자신도 세상 보는 눈을 새롭게 하자는 것이지요."
'하늘 아래 첫동네'로 불리는 강원도 고한 두문동 탄광촌에서 23년간 지속했던 무의촌 진료와 공부방,부천·부평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인권보호 및 노동쟁의 지원,인성계발 등을 돕는 노동사목,가출 청소년 쉼터와 공부방 역시 성심수녀회가 사랑을 전하는 활동들이다.
관구장 수녀의 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백발의 할머니 수녀 한 분이 들어선다.
성심수녀회의 최연장자이자 역사의 산 증인인 김재순 수녀(80)다.
김재순 수녀는 진명여고를 나와 미국 위스콘신대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수녀가 돼 1960년 귀국한 뒤 성심여대에 재직하며 총장을 지낸 인물.동생(김재숙)도 수녀이고,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 때 순직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그뿐이랴.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에 나오는 춘천 성심여자대학의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의 한 명이 바로 그다.
"주매분 수녀님이 학장,제가 교무처장을 맡고 있을 때인데 피천득 선생님에게 강의를 부탁하기 위해 댁으로 찾아갔던 일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왕복 4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마다않고 선생님께서 강의를 해주셨지요.
그런 인연이 정말로 수필 '인연'에 나올 줄은 몰랐지요."
수필 '인연'을 보면 선생이 열일곱살 때 처음 일본 도쿄에 가서 묵었던 미우라 선생 댁의 어린 딸 아사코가 성심여학원 소학교 1학년이었다.
'성심'이라는 인연이 선생으로 하여금 강의를 맡게 하고 또 수필 '인연'을 쓰게 한 것 아닐까.
"처음 귀국했을 때는 매일 석유램프를 닦아놓는 게 빼놓을 수 없는 일의 하나였어요.
전기가 자주 끊어지기 때문이었지요.
그때는 옛 용산신학교 자리에서 살았는데 숙소가 따로 없어 공동체방에서 야전침대를 놓고 잤어요.
학교 교무를 맡았을 땐 사무실이 곧 침실이었지요."
김재순 수녀는 "난방도 안 되고 물도 전기도 없었던 이곳에 자리잡은 이듬해 18명의 학생으로 여학교를 열었는데 지금은 여고 한 학년이 400여명이나 되니 많이 발전한 것"이라며 상념에 젖는다.
그는 "예전에는 중세 복장(수녀복)을 입고도 피구 농구 하키까지 했다"며 사복 생활의 장단점을 설명한다.
수녀복은 교황이나 임금을 만나든,고아원에 가든 그 하나면 족하지만 사복은 상대방에 장소,상황에 따라 맞게 갖춰 입어야 하니 불편한 점도 있다.
옷이며,머리,신발 등을 신경써야 하는 것도 번거롭다.
그러나 사복을 입고 있으면 신자들이 특별대우를 하려 들지 않아서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시장 가서 물건 값을 깎기도 좋아요.
상인들이 언니,아줌마,어머니,사모님 하고 부르면 '아,내 나이면 이런 역할을 하게 되는구나' 하고 현실감각을 갖게 되니 사복을 입는 은혜지요.
누가 '자녀가 몇이냐'고 물으면 '아들은 없고 딸은 많다'고 해요."
관구장 김숙희 수녀가 이렇게 설명하며 웃는다.
성심수녀회의 회원은 청원자를 포함해서 모두 69명.원효로에 있는 본부공동체와 성심공동체,학교 맞은편의 뒤셴공동체 등에서 30여명이 살고 나머지는 파주에 있는 피정의 집 '예수마음배움터'와 역곡 일대 쉼터 3곳 등에서 소규모 공동체를 이뤄 생활한다.
김숙희 수녀는 "세상이 아무리 밉고 죄가 많은 곳이라 해도 우리 역시 그 일부이며 구원해야 할 대상"이라면서 "세상은 우리의 큰 화두"라고 했다.
그래서 성심수녀회는 '전적으로 관상적이며,전적으로 사도적인 영성'을 특징으로 한다.
기도와 봉사라는 두 끈 모두 놓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수도원행을 결심하는 것은 삶에 대한 열정이 있고 세상에 대한 관심이 커야 가능한 일"이라며 "수도원에 들어온다는 것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신문도 많이 보고 세상을 향해 많이 열려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성심수녀회의 분위기는 밝고 경쾌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활기차게 교정을 누비는 성심의 여학생들처럼.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