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굳게 닫혔던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과 주변 집옥재 일대가 45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청와대 정문과 마주한 신무문-집옥재 일대는 대통령 경호를 위해 신무문 주변 경복궁 북부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금족지(禁足地)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경복궁 정비 계획의 일환으로 1996년 군부대가 철수한 이후 복원 등의 사전준비를 거쳐 마침내 일반공개가 이뤄지게 됐다.

문화재청은 1997년 이후 2005년까지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빈전건물인 태원전 권역 일대에 대한 복원을 실시했다.

군부대가 철수한 대신 특수지역 경호를 위한 소규모 상황실로 신무문 좌측에 한식건물이 들어섰다.

이 경호상황실(31.36평)은 2001년에 건립된 평면 ㄱ자형 한식목조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곳에는 713전투경찰대가 상주하고 있다.

이번에 개방된 신무문은 전체 면적이 41.8평(문루는 16.8평)이며 높이는 12m다.

1층에는 무지개 모양의 통로시설인 홍예문을 마련했으며 그 천장에는 북방을 관장하는 상상의 동물로서 거북과 뱀이 뒤엉킨 현무(玄武)를 그려놓았다.

경복궁 근정전을 중심으로 동쪽 정문인 건춘문(建春門)에는 기린이, 서쪽 영추문(迎秋門)에는 백호, 남쪽 광화문에는 주작(朱雀)을 그린 것은 동아시아 전통의 음양오행설에 의한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청룡(靑龍)이 들어가야 할 동문에 기린이 들어앉은 이유는 아직까지 원인 불명이다.

신무문은 세종 15년 경복궁이 창건될 때 그 북문(北門)으로 들어섰다가, 성종 6년(1475) 예문관 대제학 서거정의 건의에 의해 신무문(神武門)이란 이름으로 편액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신무문은 고종 2년(1865) 9월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이란 이름으로 재등장했다.

상량문은 한성부 판윤 조득림이 썼고 현판은 영건도감 부제조 이현직 작품이다.

원래 북문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잘 이용하지 않는다.

신무문 또한 평상시는 닫아두었다가, 국왕이 후원에서 소요(逍遙)하거나 열무(閱武), 관농(觀農)을 위해 행차할 때 이용했다.

또한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會盟壇)이 그 인근에 있었던 까닭에 국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인 회맹제에 참석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중종 1년 1506년 10월19일)
중종실록 14년(1519) 조를 보면, 당시 기묘사화 때 남곤(南袞) 등이 밤에 신무문으로 들어가 변고를 아뢰어 조광조(趙光祖) 일파를 결국 사사케 했다.

이 사건을 조선왕조의 또 다른 정사 기록인 국조보감에서는 "북문으로 몰래 들어갔다"(북문잠입. 北門潛入)라고 말하고 있다.

영조 때는 숙종의 후궁이자 왕의 생모인 숙빈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왕이 참배할 때 터만 남은 신무문을 이용해 나갔다고 한다.

중건 뒤인 고종 33년(1896)에는 아관파천 때 고종이 신무문을 통해 러시아대사관으로 들어갔다.

함께 개방된 집옥재는 신무문 동측에 위치한다.

남쪽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에 팔각건물인 팔우정, 오른쪽에 협길당이란 건물이 자리한다.

이들 건물들과 함께 지금은 없어진 보현당, 가회정 등이 주변에 있어 고종이 서재 겸 별채로 사용하던 곳이다.

집옥재는 고종 13년(1876) 경복궁이 대화재를 만나 왕이 창덕궁으로 잠시 옮겼다가 동 22년(1885) 경복궁으로 환궁해 25년(1888) 내전을 복구할 때까지 왕이 서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48평 규모인 집옥재는 열성어진을 봉안하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외국공사 접견이나 연회장소로도 사용했다.

협길당(9평)은 집옥재의 부속건물이며, 팔우정(37평)은 집옥재가 고종의 서재로 사용될 당시 그 서고로 건립됐다.

집옥재는 정면에 월대를 갖춘 정면 5칸, 측면 4칸 다포맞배집으로, 다른 전각의 월대와는 달리 구성방식이 화려하고 복잡하다.

월대 중앙의 계단에는 벽사(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의 의미를 지니는 서수상을 두어 건물의 격을 높였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