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전자업체들의 평판TV가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다.

종전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디자인과 기능,마케팅을 통해 세계 소비자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는 것.삼성전자가 와인잔의 모습을 형상화해 내놓은 LCD TV 보르도는 지난 9월말 출시 6개월만에 100만대가 팔려 나갔고 생방송을 멈춰서 볼 수 있는 기능을 담은 LG전자의 타이머신 TV도 최근까지 40만대 넘게 팔려 나가 올해안에 100만대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 평판TV의 활약은 철저한 시장 조사를 통해 소비자들의 니즈(욕구)를 간파한 데 따른 쾌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두 제품의 판매호조로 삼성과 LG는 브랜드 인지도를 크게 높였을 뿐 아니라 평판TV 시장을 주도하는 사실상의 마켓리더(시장선도업체)로 자리잡게 됐다.


<삼성전자 '보르도 TV' - 와인잔 형상화 … 디자인의 승리 >

"거실에 TV를 대신해서 무엇을 놓겠습니까?" "글쎄요.

TV 외에는 마땅한 것이 없네요." "그러면 어떤 TV가 좋을까요?"

지난해 7월 삼성전자 TV상품기획팀의 시장조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소비자들이 평판TV를 살 때 기술적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가구와 같은 외형을 가진 제품을 원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실제로 가구점에 가서 소비자들이 무엇을 보고 구매 결정을 내리는지 관찰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린 결론은 이랬다.

즉 △집안 어느 곳에 설치해도 인테리어와 잘 어울리는 TV △설치해 놓으면 이쁠 것 같은 TV △꺼져 있어도 이쁜 TV △기능 중심의 소구가 아닌 고객의 감성을 터치할 수 있는 TV.

지난 9월 출시 6개월 만에 100만대가 팔려 나간 삼성전자의 LCD TV 보르도는 이 같은 기획 의도 아래 개발됐다.

제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디자인 컨셉트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고민에 빠져 있던 개발팀은 어느 날 퇴근 후 와인을 한 잔씩 마셨다.

여기에서 영감이 떠올랐다.

누군가 내려놓은 와인 잔에 살짝 남아 있는 붉은 와인과 조명 아래 반짝이는 투명한 유리잔,그리고 이미 마셔 버린 와인의 은은한 취기.와인이 가진 열정과 기분 좋은 감성을 TV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붉은 와인이 살짝 남아 있는 투명 유리잔을 모티브로 수백장의 스케치를 거쳐 이미지 컨셉트를 만들었다.

이름은 포도주 원산지로 유명한 '보르도'로 붙였다.

이어서 디자인,상품전략,회로,패널,구매,소프트웨어,상품기획,마케팅 등 기획부터 판매까지 모든 구성원이 모여 제품 개발에 돌입했다.

11명으로 이뤄진 '보르도 TF'가 구성된 것이다.

그후 5개월에 걸친 개발 기간을 거쳐 지난 2월 보르도 TV 완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보르도의 개발에는 모든 부서가 참여했지만 역시 그 중심은 디자인이었다.

보르도 TF팀이 일치한 의견은 "디자인 컨셉트를 100% 만족시키자"였던 것.최지성 디지털미디어 총괄 사장도 "디자인 목업(모형)과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했을 정도다.

이에 따라 개발실은 여러 번의 설계 과정과 회로물의 재배치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처음의 디자인 목업과 똑같은 제품을 만들었다.

고광택 기술을 제품 전면뿐 아니라 후면에 처음으로 적용했고 기존 부품으로는 제품의 두께를 줄일 수 없었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이 요구한 대로 부품을 새로 만들고 배선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보르도 TF에 참여했던 한 마케팅 관계자는 "TF팀 멤버들은 와인과 함께 생활한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레드 와인을 사무실에 배치해 놓고 와인의 감성으로 제품 개발에 몰입하려고 노력했다"고 털어놨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난 4월 출시된 보르도 TV는 삼성전자의 LCD TV를 명품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이를 통해 보르도 출시 전인 지난 3월 11.9%에 그쳤던 삼성 LCD TV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지난 7월 17.5%로 상승했다.

특히 6월에는 소니의 LCD TV 브랜드인 브라비아를 제치고 선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등 주요 국가에서 LCD TV 시장점유율 1위를 지켜가고 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

< 강윤제 삼성전자 수석디자이너 >

"보르도 TV의 성공은 디자이너,마케터,엔지니어들의 합작품이었습니다."

보르도와 모젤의 디자인 작업을 주도한 강윤제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디자인그룹 수석디자이너(부장)는 보르도의 성공 비결을 전사적인 팀워크의 결과였다고 털어놓았다.

거실 인테리어를 중시하는 고급 소비자들을 겨냥하기 위해 와인잔을 형상화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놨지만 마케팅 부서와 엔지니어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제품 출시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1994년에 입사,12년 동안 TV 디자인에 젊음을 바친 강 수석 디자이너는 "TV 디자인은 무엇보다 유행을 너무 따라가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휴대폰이나 MP3플레이어와 달리 TV는 10년 이상 거실에 두고 쓰는 물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르도와 모젤 역시 이 같은 철학 아래 최대한 화면만 부각시키는 간결한 디자인으로 승부,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는 "10년 전만 해도 디자이너는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놓은 제품에 외피만 입히는 수준에 그쳤지만 이젠 디자이너가 제품을 기획하면 마케팅 부서가 판매 전략을 짜고 이에 따라 생산이 이뤄진다"며 "보르도 후속 평판TV 제품들도 디자인이 중심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LG전자 '타임머신TV' - '다시보는 TV' 시장판도 바꿔 >

생방송을 멈췄다 다시 보는 기능을 적용해 일반 평판TV에 비해 300달러에서 500달러 정도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는 LG전자의 타임머신 TV.지난해 12월 북미시장을 시작으로 올 5월부터 유럽과 중동지역에 판매하고 있는 이 제품은 LG전자가 내놓은 가전제품 중 최고의 히트 제품으로 꼽힌다.

지난해 5월 출시 이후 현재까지 30만∼40만대가 팔려 나갔다.

타임머신 TV는 제품 안에 하드디스크가 들어 있어 약 1시간 분량의 방송내용을 자동으로 녹화해 일시 정지나 반복 재생할 수 있는 제품이다.

'놓친 장면이나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을 바로 되돌려 볼 수 있는 TV를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에서 2003년 개발을 시작해 2년여의 노력 끝에 지난해 출시됐다.

디지털 방송은 디지털 신호로 구성되어 있음을 착안해 방송 콘텐츠를 대표적 디지털 저장매체인 하드디스크에 저장하고 재생하도록 한 게 기본 개념이다.

LG전자 관계자는 "별도의 저장매체 없이 HD급 방송을 최대 21시간까지,아날로그 방송은 92시간까지 녹화가 가능하다"며 "축구경기를 보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남성들이나 드라마를 보다 잠시 부엌일을 봐야 하는 주부들에게 타임머신 TV는 엄청난 편의를 가져다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타임머신 TV는 출시 초기 젊은층을 중심으로만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모든 연령층으로 소비자의 폭이 확대됐다.

이에 따라 LG전자는 PDP TV 전체 판매량의 50%를 타임머신 TV로 판매하고 있으며 올해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한 타임머신 LCD TV도 출시 이후 LCD TV 판매의 절반을 대체하고 있다.

이제는 타임머신 기능이 37인치 이상 모든 평판TV(PDP·LCD TV)에 기본 기능으로 들어갈 정도다.

타임머신 TV는 세계 평판TV 시장의 판도도 바꿔놓고 있다.

LG전자에 이어 도시바가 지난해 2분기 32인치와 37인치 LCD TV에 타임머신 기능을 적용했으며 3분기에는 히타치가 42인치와 55인치 PDP TV에 이 기능을 넣었다.

LG전자 DD(디지털디스플레이)사업본부장 윤상한 부사장은 "타임머신 TV가 대화면 평판TV 수요를 가속화시킬 것"이라며 "세계 주요 TV 업체들이 대화면 평판TV에 타임머신 기능을 기본 기능으로 채택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타임머신 TV는 이 같은 성공에 힘입어 세계적 디자인상인 독일의 IF 디자인상과 레드 닷(Red dot) 디자인상을 받았다.

지난해 1월에는 미국에서 열린 CES 2005에서 혁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에는 세계적 시장조사기관인 IDG가 운영하는 정보기술(IT) 전문 사이트 IT월드가 이 제품을 '5월의 최고 IT 제품'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한편 타임머신 TV의 성공에는 제품명도 한몫 톡톡히 했다는 후문이다.

당초 LG전자는 '타임머신'이라는 제품명 대신 일반적으로 가전 제품에 붙이는 영문 알파벳과 숫자 조합 형태의 이름을 정했다.

하지만 이미 '휘센' 에어컨,'트롬' 세탁기 등을 통해 제품 이름의 중요성을 체험한 마케팅팀에서 부르기 쉬운 이름을 제안하면서 한때 A전자업체가 잠깐 사용하다 중단한 '타임머신'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

< 권일근 LG전자 상무 >

"2002년 미국 동계올림픽 당시였어요.

쇼트트랙 경기에서 미국의 안톤 오노 선수가 '할리우드 액션'으로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을 빼앗아가는 걸 보고 무척 화가 났죠.그때 생방송도 되돌리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타임머신 TV 개발의 주역인 권일근 LG전자 DDC(디지털디스플레이컴퍼니)연구소 상무에게 안톤 오노는 역설적이게도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생방송을 멈췄다 보는 TV'의 아이디어를 가져다준 인물이었기 때문.

오노 덕분에 떠올린 엉뚱한 아이디어는 하지만 실행으로 옮겨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2002년 가을에 생방송을 멈출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외장형 DVR 제품을 내놨지만 한 달에 200대를 팔지 못해 실패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DVR의 실패는 성공의 주춧돌이 됐다.

TV와 DVR 각각의 리모컨을 사용해야 하는 번거로움,복잡한 연결선으로 인한 미관 문제,TV신호가 DVR를 거쳐 TV로 들어오기 때문에 발생한 화질 열화 현상 등이 실패의 주요 원인이었다.

권 상무는 "이 같은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구미에서 8개월이 넘는 합숙을 거쳐 개발에 성공했던 경험은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