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한 컨설팅사는 1990년 후반 국내 유명 대학으로부터 구조조정 방안 및 발전 방향에 대한 연구를 의뢰받았다.

몇 개월간의 컨설팅이 끝난 후 이 회사 관계자는 대학측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특정 외국 문학학과의 교수가 이처럼 많은 대학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정말 이런 수요가 있는 건가요."

최근 국내에선 인문학이 변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특정 학문이나 학과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

대학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인문학 전공자들이 우리 사회의 수요를 넘어선 것은 아닌지,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키우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한 사립대학의 인문학 교수는 "문학이나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이렇게 많을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철학이란 새로운 시대에 사유(思惟)를 가능케 하는 도구와 연장을 만드는 것이지 헤겔이나 칸트 등 철학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며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인문학의 교육 내용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맥락화'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재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세계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문학과 역사,철학 등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동시에 기업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역전문가를 양성한다거나 경영학이나 자본주의적 관점을 습득한 인문학도를 양성하자는 게 그것이다.

영국 런던대학에서 '아시아-아프리카 스터디',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동아시아 연구가 각각 각광을 받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처음 개설돼 올해 2학년생 전공자 16명을 선발한 건국대학교 EU문화정보학이 테스트 베드다.

건대는 일부 교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난해 독문과와 불문과를 없애는 대신 EU문화정보학과를 신설했다.

단순히 해당 지역의 언어와 문학만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인문학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효용성을 갖는지를 고민하자는 게 그 목적이다.

EU문화정보학 전공 과목에는 'EU유행패션,브랜드와 광고' 'EU문화트렌드 리서치' 'EU inter-cultural management'도 포함돼 있다.

인문학의 반석 위에서 명품 브랜드를 갖고 있는 유럽 국가들이 어떻게 럭셔리 문화를 산업화했는지 그 전략이나 경영적 가치를 연구하겠다는 것이다.

김동윤 EU문화정보학과 교수는 "월마트 까르푸 등이 국내에서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를 고민해 보면 의외로 답이 쉽게 나온다"며 "세계 각 지역의 언어와 문학,철학,역사,사회 시스템을 공부한 인문학도들이 '고상학 인문학'만을 추구하는 영역의 벽을 파괴하고 시선을 넓히면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존재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