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내려 나뭇잎 질 때 성긴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는다.

바람에 나부끼는 노란 잎은 옷소매에 점점이 떨어지고,들새는 나무 우듬지에서 날아올라 사람을 엿본다.

황량한 땅이 이 순간 맑고 드넓어진다.'

조선 중기 문인 신흠(申欽)의 '야언(野言)'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일 모레면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절기 상강(霜降).가을이 깊어가는 이 시기에 감상하기 좋은 명문이다.

국문학자 김풍기 강원대 교수는 '삼라만상을 열치다'(푸르메)에서 이처럼 한시에 담은 24절기의 마음을 한 자락씩 펼쳐보인다.

도연명 구양수 이규보 정약용 등 중국과 우리나라 시인의 한시 80여편에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과 여러 에피소드를 곁들이고 산책길의 사색 보따리까지 풀어 보탰다.

모두가 절기에 맞는 작품들이다.

그는 입동(立冬) 무렵에 중국 시인 왕유의 시를 한 편 건넨다.

'나 홀로 타향에 나그네 되니/아름다운 절기 맞을 때마다 더더욱 어버이 생각./어렴풋이 알겠지,형제들 높은 곳에 올라가서/모두들 수유 꽂다가 한 사람 적다는 것을.'

그리고는 '고향 그리는 시가 무수히 많지만 이 작품처럼 가슴이 찡한 것을 만나지 못했다"며 '창밖 산등성이 쪽으로 부모님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오래 익은 절창의 깊은 맛과 지금 현재의 우리네 삶이 정겹게 만나는 접점이 여기에 있다.

280쪽,1만1000원.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