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기업'을 좋게 보았던 사람은 별로 없다. 기업은 개인의 집합이요 분업 조직에 불과하지만 살아있는 인격체처럼 대접받고 있으니 이 기이한 존재에 대한 논쟁도 쉽게 결론이 날 문제는 아니다. 주식회사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분업 조직이 갖는 폭발적 생산력'으로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설명했던 애덤 스미스조차 주식회사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었다. 스미스는 "주식회사란 거들먹거리는 전문경영인을 합리화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개인 기업은 찬성이지만 주식회사는 반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미스만도 아니다. 근대 자유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했던 존 스튜어트 밀은 아예 "주식회사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라고 일갈했다. 밀은 "주식회사는 혼이 없다"고도 말했다. 주인 아닌 대리인들이 안방 차지를 하고 있으니 도저히 곱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시장경제는 곧 분업의 조직화임을 밝혀냈던 대 사상가들조차 주식회사에 대해서는 이처럼 마뜩찮은 반응을 보여왔으니 오늘날 반자유주의요 반시장경제 진영에 속한 사람들에게야 그 존재가 결코 달가울 까닭이 없다. 20세기 소위 진보사상의 이론적 참호 역할을 해왔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헤르베르트 폰 마르쿠제는 "기업의 자유 따위는 철폐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굶어 죽을 자유라는 말처럼 모순적이며 노동할 자유라는 말처럼 기만적"이라고 공격할 정도였다. 그래서 기업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바탕 위에서 이해관계자 모두가 기업을 공동소유하는 일종의 '조합'으로 재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독일의 기업지배구조는 이런 주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오늘날 참여정부 아래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조선 주자학의 후예들이 기업의 자유 '따위'를 공격하고 봉쇄하며 천박한 장사꾼에 불과한 기업가를 통제·관리하려 드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일이다. 사농공상의 위대한 전통까지 온전히 보유하고 있는 나라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식인 그룹,혹은 그것의 대표격인 정부 관료들이 기업인을 폄훼하고 무시하며 가만히 두면 반드시 죄를 저지르는 악행의 조직화처럼 보면서 갖은 법률을 만들어 범죄모의를 사전 단속하려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갑오경장에 와서야 비로소 상업할 자유가 보장되었던 나라 아닌가 말이다. 이제 먹고살만해졌으니 다시 예의염치의 주자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원리주의 본능이 발동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주식회사 제도의 총화인 증권시장 이론까지 기업과 기업가를 공격하는 무기로 차용하고 있으니 반기업 정서의 뿌리는 깊고도 넓다. 그러니 공정거래위원회가 출자규제를 푸는 대신 순환출자 금지라는 또 하나의 괴물을 내놓더라도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해서" 따위의 내심 원치도 않는 명분을 달지 않길 바랄 뿐이다. 선진국에서도 부분적인 상호출자는 허용돼 있다든가, 대부분 나라에서 대주주에게는 수십개 수백개의 차등의결권을 주고 있다든가, 포이즌 필(주식인수 예약제) 등의 완벽한 경영권 보호장치가 확보돼 있다는 따위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엔 재벌이라는 특수한 존재가 있고 재벌은 나쁘다는 괴이한 논리만 내세우면 만사를 현대판 주자학자들의 주장대로 끌고 갈 수가 있는 법이다. 논란이 끊이지 않는 상법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회사기회 유용금지라는 도덕적 구호만으로도 관료주의적 권한을 무한 확장하고 기업인을 법정에 끌어내 겁주기에 충분하다.

한국 기업인들을 재판정에 끌어내 모욕을 주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론 한국 기업 소유권이 모조리 외국자본에 넘어가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이미 금융개혁이란 이름으로 시중은행의 소유권을 몽땅 외국에 넘기지 않았는가 말이다. 정부 면허장으로 자금흐름의 통과세를 받을 뿐인 은행도 넘겼는데 다른 무엇을 넘기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제 순환출자 금지와 재벌개혁이란 이름으로 한국기업의 소유권도 모두 외국에 넘겨주기로 작정한 것일 뿐이다. 의제 자본(투기자본)으로 진성 자본(창업자본)을 탈취케 하는 이 기이한 전도현상을 애덤 스미스는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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