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萬洙 <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 >

지금까지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쓰지 않겠다던 정부가 '사실상 불황'을 인정하고 필요 시 내년에 재정을 조기에 집행할 뜻을 밝혔다. 내년의 대통령선거용으로 우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치계절이 되면 어느 나라 없이 집권당은 정권재창출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경기부양정책을 다 쓰는 것이 보통이다. 원칙과 정도(正道)에 입각한 경기부양정책이라면 정치적인 동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 삼을 게 아니다. 지금까지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쓰지 않겠다고 한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원칙과 정도에 벗어난 정치적인 경기부양책이 얼마나 큰 부작용이 있었던가를 경험했다.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부는 엄청난 돈을 풀어 경기를 억지로 부양시키고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2001년과 2002년 두 해 동안 카드대출,주택자금대출,창업자금대출 등으로 207조원(과거 총통화 M2 기준)을 풀어 2001년 3.8%이던 경제성장률을 7.0%로 끌어올렸다. 총통화의 GDP에 대한 비율이 과거 40%대에서 2002년에는 90.6%으로 두 배나 올라갔다. 정권재창출에는 성공했지만 370조원에 달하는 부동자금으로 주택가격의 상승,거액의 카드채권사태와 250만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사태를 초래했고 그 후유증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아 내수경기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잘 알고 있는 정부가 경기부양에 선뜻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가 경기부양을 하고 싶어도 기존의 경제정책 골격을 그대로 두고는 뚜렷한 대안이 없다. 대기업에 대한 투자규제는 참여정부의 기본정책에 해당하기 때문에 풀기 어렵고,푼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가 다음 대선(大選) 전에 나오기 힘들다. 민간소비의 진작도 건설경기 침체와 400만 신용불량자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에 난망한 과제다. 정부의 투기억제정책에도 불구하고 400조원에 이르는 부동자금은 아파트가격을 계속 밀어올리고 있어 돈을 더 풀 수도 없다.

기껏 재정의 조기집행 정도이지만 과거의 경험으로 봐서 경기부양에 거의 효력이 없다.

정부는 올해 5% 정도의 경제성장률을 전망하고 있지만 민간연구기관은 4%대로 전망하고 있으며,내년은 이마저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정부가 투자와 소비에 대한 기존 정책의 틀을 유지하는 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경기부양정책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쓸 만한 정책수단이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이런 점에서 재정을 조기집행하더라도 정부가 인위적인 경기부양정책을 쓰지 않겠다는 말은 일관성과 정직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재정의 조기집행 정도를 대선용으로 의심할 필요는 없다.

경제지표들을 관찰하면 우리는 1995년 이래 10여년 동안 일부 대기업의 수출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정으로 불황에서 탈출하려면 먼저 투자의 가장 큰 걸림돌인 대기업출자규제와 경영권 불안을 해소하여야 한다. 외국의 헤지펀드들은 부채가 거의 없고 현금보유가 많은 한국의 대기업들을 가장 좋은 사냥감으로 여긴다니 출자규제와 경영권 불안으로 외국의 투기자본가에게 호재(好材)를 주는 꼴이다. 건설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투기억제 위주의 부동산정책에서 공급위주정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민간소비를 증가시키기 위해 집 한 채 가진 사람들에게 가혹한 부동산보유세를 매기는 것도 재고해야 하고,신용불량자들이 살면서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대규모의 채무조정이 있어야 한다. 외환보유고도 6개월분 수입금액에 해당하는 1500억달러 정도로 줄이고 해외투자를 활성화하여 환율을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 가격경쟁력을 유지해줘야 한다.

투자,소비,내수,환율에 대한 적절한 정책들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경제가 오랫동안 어려운데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전자,자동차,조선,철강 등 대기업의 수출이 버텨준 덕이다. 외국사람들은 우리의 대기업을 부러워하는데 정작 국내에서는 비난받고 규제 당하는 현실을 개선하여 기업가정신을 되찾아줘야 한다. 원칙과 순리에 따른 경기부양책이라면 선거용이라도 문제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