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복의 미학'이라고 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일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후 곧바로 자신의 오른팔인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경질한 것을 두고 누군가 한 말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 정도로 보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잇단 재보선에서 40 대 0으로 완패해놓고 지지 않았다고 우기는 노무현 정부와 대비된다고까지 논평했다. 노 대통령이 5·31 지방선거 참패 후 "한두 번 선거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어느 당이 흥하고 망하고 그런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고 주장한 것과 부시 대통령의 신속한 국방장관 경질이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속을 들여다 보면 다를 게 없다. 럼즈펠드 장관의 경질은 버스 떠난 뒤 손 흔드는 격이었다. 여당 중진 의원들조차 진흙탕으로 빠진 이라크전의 책임을 물어 오래 전부터 그의 경질을 주장해왔다. 럼즈펠드 본인도 2년 전 이라크 병사들에 대한 미군의 잔혹행위에 책임을 느끼고 두 번씩이나 사의를 표시했다.

그를 끝까지 잡아둔 것은 이라크전 실패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욕심이었다. 이라크를 교두보로 삼아 중동지역에 민주주의와 자유를 전파하겠다는 이상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것이다. 전쟁 사령탑을 쫓아내라는 여론이 빗발쳤지만 부시 대통령은 국민들이 언젠가 '역사적 과업'을 인정해줄 것이라는 고집으로 럼즈펠드를 붙들었다. 중간선거 1주일 전 "그와 임기 말까지 함께 가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오만의 한 걸음 뒤가 파멸이다. 잘못된 전쟁을 끌어안고 비판 여론을 외면한 오만이 선거 참패라는 파멸을 부른 셈이다. 럼즈펠드 경질은 선거 패배를 인정하는 미학이라기보다는 수렁에 빠진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부린 오만이 초래한 파멸의 부스러기였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오만의 한 자락은 버리지 않았다. "(적들은) 너무 즐거워하지 마라"고.

오늘 한국 사회는 그보다 더한 청와대의 오만과 독선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 청와대 홍보수석실이 10일자로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지금 집 사지 마라'는 글은 집권 세력의 날 선 오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동산 대책이 먹혀들지 않는 근본 원인은 정부 정책이 신뢰를 잃은 탓인데도 신뢰를 회복하려는 솔직한 노력 없이 자고나면 근거 없는 가격 안정 타령이다.

정부 관계자들이 부동산을 잡겠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다. "부동산 투기로 돈 버는 것은 불가능하다."(김진표 전 경제부총리,2003년 10·29대책) "집 값을 2년 전으로 되돌리겠다."(한덕수 전 경제부총리,2005년 8·31대책) "8·31은 강력한 정책이다. 지금 집 사지 마라."(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2006년10월23일)

이만하면 오만의 칼을 접을 때도 됐다. 잘못된 원인을 부동산 전문가들과 함께 조용히 찾아 나서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홍보수석실 사람이 국민을 상대로 엉뚱한 강연이나 하고 있으니 그 오불관언(吾不關焉)에 기가 찰 따름이다. '오만 뒤엔 치욕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쏟아지는 비난의 댓글은 청와대의 오만이 그들에게 치욕을 안겨주고 파멸로 몰고 갈 만큼 도를 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고광철 국제부장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