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죠,뭐." 순환출자 규제를 도입하지 않는 대신 현행 출자총액제한제도 적용범위를 대폭 축소하기로 했다는 정부의 방침에 대해 재계의 한 관계자는 14일 이처럼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이른바 '중핵기업' 출총제 시행으로 규제대상 기업이 343개에서 24개로 크게 줄어드는데도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환출자 규제 역시 처음부터 정부와 공식적인 '협상'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새삼스럽게 고마울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재계는 우선 24개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투자 확대에 목말라하고 있는 국내 간판기업들이 즐비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롯데쇼핑 GS건설 한화 금호타이어 등 동일 계열 내에서 가장 많은 투자수요를 안고 있는 기업들이 이번에도 출총제의 족쇄로부터 풀려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14조원 어디서 나오나?

이에 따라 "출총제가 조건 없이 폐지되면 8개그룹이 총 14조원을 추가로 투자할 수 있다"고 했던 재계의 희망 섞인 바람도 물거품이 될 전망이다.

재계 관계자는 "겉으로 보면 규제 완화 효과가 대단할 것 같지만 재계의 속사정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며 "추가 투자 규모로 거론되고 있는 14조원의 상당부분은 여전히 출총제 규제에 묶이게 되는 24개 기업으로부터 나올 돈"이라고 말했다.

결국 '무늬만 규제 완화'일 뿐, 대상 기업 축소가 투자 확대를 통한 경제활성화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실제 현재 '중핵기업'들이 그룹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출자비율을 살펴보면 삼성그룹은 85%,현대자동차그룹은 무려 95.4%에 달해 현행 출총제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분석 결과까지 나와 있다.

이 때문에 이현석 대한상공회의소 조사1본부장도 "현재 투자에 애로를 겪고 있는 기업들의 대부분이 자산 2조원 이상의 중핵기업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규제 완화의 실효성이 없다"며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언제까지 규제할 건가?

삼성 관계자는 "출총제를 완화하기로 했다는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삼성그룹으로선 아무런 혜택이 없다"며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 관계자는 "삼성그룹의 경우 매출의 80%를 해외에서 거둬들이고 있는데도 투자규제에 발목이 묶여 있다"며 "어떤 형태든지 기업의 건전한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들은 사라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SK 관계자도 "최근 경영환경은 제품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경영 활동의 범위는 넓어지고 있다"며 "출총제와 같은 사전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는 한 원활한 경영활동을 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출총제라는 규제의 목적이 지배구조,문어발식 확장,가공자본 등의 문제를 겨냥하고 있는데 이는 상법 증권거래법 등을 통해 사후적으로도 충분히 규제할 수 있다"며 "출총제는 하루 빨리 폐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순환출자금지,꺼진 불?

재계는 이번에 순환출자 규제를 도입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정부가 재계의 요구에 애써 부응했다기 보다는 "사필귀정 아니냐"며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공정위가 경제여건 변화에 따라 순환출자 규제를 또다시 들고나올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는 데다 일부 시민단체를 비롯한 반기업 세력들도 외곽에서 순환출자 문제를 계속 물고 늘어질 가능성이 높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재계는 이에 따라 △순환출자 규제는 공정위가 재계와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여론몰이를 했고 △기업 경영의 안정성을 현저하게 훼손하며 △이미 만들어진 출자구조를 인위적으로 개편하는 정책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는 점 등을 국민에게 지속적으로 알려나간다는 계획이다.

조일훈·유창재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