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의 경영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최근 경영인들의 책임이 경영활동 자체를 벗어나 사회적 측면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주주와 소비자들이 기업을 상대로한 소송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데다 패소할 경우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위험에 노출돼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경영자의 법적 책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기업인들이 위험을 감수하는 공격적인 경영을 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송종준 충북대 법학과 교수는 20일 열린 '경영판단의 원칙' 세미나에서 "지난달 4일 입법예고된 상법개정안에 경영판단원칙을 포함시키는 논의가 있었지만 반영되지 못했다"며 "법원이 경영 판단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에는 사실상 한계가 있기 때문에 판례에서라도 이 같은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판단의 원칙이란

경영판단 존중의 원칙이라고도 불린다.


이 원칙은 이사가 △자신의 권한 내에서 △합리적인 근거에 기초해 △회사에 이익이 된다는 믿음 아래 △독자적으로 결단을 내렸다면 판단상의 잘못으로 회사에 손해가 생길지라도 이사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말한다.

송종준 교수와 김앤장법률사무소의 홍석범 변호사는 주제발표에서 이 원칙이 적용되면 △경영판단에 대한 사법 심사를 억제하고 △주주들의 이사에 대한 책임 추궁의 남용을 방지하고 △이사회에 권한을 집중시켜 대표성 없는 주주들로부터 전체 주주들을 보호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유능한 경영진을 확보할 수 있어 효율적으로 경영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였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적용

세미나 참석자들은 경영판단 원칙은 미국에서는 판례를 통해 이미 많이 적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송 교수는 "영·미 국가에서는 경영상의 판단에 대해 엄격한 책임원칙에 따라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바람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미 200여년 동안 고민을 했고 그만큼의 법리가 적용돼 활용되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도 1993년 노무라증권이 도쿄방송과 특정금전신탁계약을 맺고 자금을 운용하다 입은 3억6000만엔의 손실에 대해 노무라증권 대표이사를 상대로 낸 주주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경영판단을 존중하는 재판 결과가 있었다.

당시 도쿄 지방법원은 "기업의 경영에 대한 판단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유동적이고 복합하고 다양한 요소를 대상으로 하는 종합적 판단"이라며 "이사의 경영판단이 결과적으로 회사에 손실을 가져왔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이사가 필요한 주의를 게을리 한 것으로 판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또 최근 독일에서는 주주대표 소송의 남용에 대한 해소방안으로 미국의 경영판단 원칙의 판례를 입법화한 바 있다.

홍 변호사는 "국내에서도 1998년 제일은행의 한보철강 여신 제공 사건과 삼성전자의 이천전기에 대한 출자와 지급 보증 사건에서 경영진의 판단을 존중한 판례가 있지만 아직 일반화됐다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기업 67% "경영판단원칙 입법 필요하다"

전경련이 최근 국내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기업들의 65.7%는 경영판단의 원칙이 잘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 이 기업들의 67%는 경영판단 원칙을 입법화해 경영자의 법적 책임에 대한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기업들은 경영판단의 원칙이 적용될 경우 기대되는 효과로 △이사회 운영의 자율성 확대(36%) △사법처리의 예측가능성 제고 △남소의 방지(17%) △유능한 이사진 유인 가능 △일부 편항적인 의견에 대한 억제 기능 등의 순으로 꼽았다.

양세영 전경련 기업정책팀장은 "경영판단의 원칙을 도입한다고 해서 이사의 법적책임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라며 "오히려 법적 기준을 구체화해 책임경영을 강화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