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처음 볼펜이 선보인 것은 해방이 되면서 남쪽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서였다. 그후 6·25전쟁 중 외국 종군기자들이 필기구로 볼펜을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볼펜이 '기자펜'이란 별칭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런 탓에 우리 신문기자들도 한동안 '볼펜'으로 불렸다.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취재전선에서 뛰어야 하는 기자에게 볼펜은 그야말로 편리한 도구였던 것이다.

볼펜을 발명한 사람 역시 신문기자였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기자로 일하던 라데스라오 비로는 글을 쓰면서 많은 불편을 겪었다. 취재 도중 만년필의 잉크가 말라 버려 자주 애를 먹는가 하면,원고교정을 하면서도 몇번씩 잉크를 보충해야만 했다. 게다가 종이의 질이 좋지않아 날카로운 펜촉으로 원고지가 찢겨나가기 일쑤였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궁리끝에 발명한 게 볼펜이었다. 펜촉 대신 볼베어링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 '펜촉이 없는 펜'으로 쓴 글씨는 물속에서도 번지지 않자,호기심에 찬 구매자들이 줄을 이었다. 대량생산에 나서면서 이를 사업으로 성공시킨 사람은 영국인 마틴이었다.

타자기 복사기와 함께 문구의 3대 혁명품으로 꼽히는 볼펜이 환갑을 맞았다고 한다. 단순한 디자인에 작고 보잘 것 없는 볼펜은 아직도 그 인기가 여전한데,볼펜의 대명사격인 '빅 비로스'의 판매가 초당 57자루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58년 볼펜잉크 개발에 성공하면서 여러 회사들이 볼펜생산에 나섰다. 그러나 품질의 결함 등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1960년대 중반 모나미가 제품을 본격생산하면서부터 학생과 직장인들 사이에 널리 쓰이게 됐다.

모든 책상에서 잉크병과 철필을 치웠던 볼펜은 편리하고 값이 싸 아직도 우리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비록 컴퓨터에 밀려 수요가 줄어들고는 있지만,이를 대체할 만한 신제품이 나오지 않는 한 이 필기구의 영화는 계속될 것 같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