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무역의 날…수출 3000억弗 달성] "마누라ㆍ자식 빼고는 다 팔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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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은 무역의 날(30일) 및 수출 3000억달러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7일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과 상사맨 출신 최고경영자(CEO)를 초청,'왕년의 수출역군에게 듣는다'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1964년 1억달러 수출에 불과하던 우리나라가 올해 세계에서 11번째로 '수출 3000억달러'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고 입을 모았다.
참석자들은 특히 환율·고유가·원자재난 등 3중고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시점에 이룬 성과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수출이 증가해도 고용 창출에 대한 역할이 미약하고,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이 감소되고 있는 점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참석자들은 따라서 혁신형 중소기업을 수출기업으로 육성하고 수출이 고용 창출에 기여하는 '수출의 질적 성장'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한국경제신문은 무역의 날(30일) 및 수출 3000억달러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7일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과 상사맨 출신 최고경영자(CEO)를 초청,'왕년의 수출역군에게 듣는다'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1964년 1억달러 수출에 불과하던 우리나라가 올해 세계에서 11번째로 '수출 3000억달러'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고 입을 모았다.
참석자들은 특히 환율·고유가·원자재난 등 3중고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시점에 이룬 성과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수출이 증가해도 고용 창출에 대한 역할이 미약하고,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이 감소되고 있는 점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참석자들은 따라서 혁신형 중소기업을 수출기업으로 육성하고 수출이 고용 창출에 기여하는 '수출의 질적 성장'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 사회 = 김상철 산업부장 ]
-수출 3000억달러 시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일익을 담당한 주역들로서 소감이 남다르실텐데요.
○정 장관=정말 꿈 같은 얘기다.
100억달러 수출에 1인당 1000달러 소득을 꿈으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무역 규모가 1억달러 이상이고 15개국 이상 수출을 해야 종합상사 면허를 정부에서 주던 때다.
당시 상사맨들의 구호는 '라면에서 미사일까지 수출한다'였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든 것을 취급했다는 얘기다.
○박 부회장=1964년 수출 1억달러 돌파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대통령은 물론 참석자 모두가 감동에 겨워하는 모습이었다.
1977년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할 때는 상사맨들조차도 기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 수출 3000억달러를 돌파했으니 감회가 새롭다.
양적인 면만 아니라 수출의 질도 변했다.
1960년대에는 철광석 무연탄 오징어를,70년대에는 합판 가발 등을,80년대에는 의류와 신발을 수출했다.
지금은 반도체 조선 자동차 등이 수출 주력 제품이 됐다.
○배 사장=1970년에 회사에 입사해 얼마 후 10억달러 수출을 맞이했다.
당시 모든 신문이 대서특필했다.
한국 사람들이 머리도 좋고 열정도 있었지만,무엇보다 '잘 살아야겠다'는 헝그리 정신이 기적을 이루는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수출전선을 뛰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를 소개해 주시죠.
○정 장관=인도에서 고생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시멘트 100만t을 인도 조달청에 공급하기 위해 인도 출장을 자주 갔는데, 항구에서 선박 적체가 심해 두 달 넘게 기다린 적이 있다.
나중에 막상 배가 왔는데 형편없는 선박이어서 좌절하곤 했다.
○박 부회장=노동집약적 제품 수출에 주력하던 국내 산업 현장에서 봉재 등 단순 노동을 통해 몸을 바쳐 수출을 일궈낸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관 주도형 수출구조 속에서 내 일처럼 지원했던 관료들의 정성도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금 사장=당시 수출을 위해 금융권의 지원이 최대 관건이었다.
은행의 대출과 협조가 수출 성사의 밑거름이 됐다.
기업,정부,금융권이 유기적으로 움직여 오늘날의 대업을 이룬 것이다.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불리는 '상사맨'의 경쟁력을 꼽으신다면.
○박 부회장=쉽게 말하면 '상사맨'은 사막에서 모래를 팔고 북극에서는 냉장고를 파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도전정신은 필수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 사람들 모두가 '상사맨' 기질이 있다.
한국인들의 도전정신과 자신감 등이 오늘의 수출 실적을 일궈낸 토대가 된 셈이다.
○배 사장='상사맨'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여겨진 게 사실이다.
팩스가 귀한 시절에는 갑자기 오더가 내려오면 근처 어디라도 뛰어가 업무를 처리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납기일 준수도 꼬박꼬박 지켜냈다.
바로 이런 게 '상사맨'의 경쟁력이다.
○이 사장='상사맨'은 몸을 던져 일했다.
외국에서 바이어들이 입국하면 유명한 식당을 찾아 술을 마셔야 했다.
지금은 이 같은 문화가 많이 사라졌지만 당시 요정이나 음식점에서 몸을 축낸 '상사맨'들이 적지 않았다.
―확대되고 있는 FTA(자유무역협정)와 국내 무역 환경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박 부회장=FTA를 하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국내 기업들은 그동안 엄청난 개방 파고를 경험하면서 문제 없이 극복해냈다.
물론 FTA를 통해 피해 업종이 있을 수 있지만 극복하고 헤쳐나가야 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발전을 위해서다.
단순한 관세 철폐나 수출 확대 차원이 아니라 국내 기업들의 기술 발전과 투자확대의 모멘텀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금 사장=조속한 참여에 동의한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시장을 가보면 대부분의 소비 제품이 '메이드 인 차이나'다.
이제 우리가 갈 수 있는 시장이 얼마 없다는 것이다.
기름이 있고 돈이 모이는 곳을 찾아야 한다.
FTA의 확대가 해답이 될 수 있다.
○정 장관=향후 국제 무역환경은 분업체계 및 산업 재배치의 가속화를 맞게 된다.
특히 FTA의 확대 등으로 10년 후 세계 교역의 약 70~80%가 FTA 역내무역이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무역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FTA 등 무역질서의 능동적인 참여가 절실하다.
―향후 수출 전망과 비전을 제시해본다면.
○정 장관=다행히 우리나라는 전 산업 부문에 걸쳐 고르게 경쟁력을 갖고 있다.
첨단 및 차세대 제품과 관련된 경쟁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5년 내 수출 5000억달러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교역규모 1조달러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도 수출 역군을 위해 박수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박 부회장=기술 개발,가격 경쟁력 확보,환율 문제에 대한 대책 등 모든 요인을 염두에 둬야 한다.
특히 선박,반도체 등 6대 전략 수출산업을 활성화시키고 부품소재의 원천기술 확보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 서비스산업 수출을 위한 묘안을 짜고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도 계속돼야 한다.
○이 사장=저임금을 통한 수출 시대가 가고 최근 고임금 수출 시대를 맞이했다.
문제는 국내 강성 노조가 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협력해야 수출 5000억달러 시대를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노사가 고통을 분담하고 서로의 발전을 위해 손을 맞잡을 수 있어야 한다.
정리=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
* 정세균 산업부 장관
# 정세균 장관(56)은 1978년부터 20여년간 '종합상사맨'으로 열정을 불태웠다.
정 장관은 당시를 '불가능이 없었던 시절'로 회상했다.
그는 퇴근 무렵 새로운 일이 떨어지면 귀가를 포기하고 회사 앞 여관을 찾았다.
통행금지 시간을 피해 일을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밤샘 근무를 마친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 곧바로 해외출장을 떠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박찬법 금호아시아나 항공부문 부회장
#박찬법 부회장(61)은 1969년부터 20년간 금호 무역부문 임직원으로 수출전선을 누볐다.
박 부회장은 해외 출장 때마다 하이타이(세제)를 챙겨 나갔다.
그는 일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욕조에 세제를 풀어 세탁을 한 뒤 냉난방기에 옷을 널어놓고 말렸다.
그러다가 방으로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말리던 옷을 황급히 치웠던 일이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 이연재 현대중공업 해양사업총괄사장
#이연재 사장(64)은 1967년부터 현대종합상사 등에서 수출 베테랑으로 활약했다.
인도 출장이 잦았던 이 사장은 무엇보다 먹거리 해결이 가장 힘들었다.
그는 어느 날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물어물어 찾아가 메뉴에도 없던 자장면을 주방장과 함께 직접 만들었다.
이 사장의 이름 이니셜을 따 'YJ누들'로 불려진 이 자장면은 당시 인도에서 음식으로 고생하던 삼성 대우 등 국내 기업의 수출맨들에게 최고 인기 식품이었다.
* 배영호 코오롱 사장
#배영호 사장(62)은 1970년부터 28년간 '상사맨'의 길을 걸었다.
1970년대 뉴욕지사 근무 시절 맨해튼의 패션 거리를 걸으며 배 사장은 분한 마음을 삭였다.
섬유제품부터 의상에 이르기까지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당시 그는 '언젠가는 한국 의류가 이곳에 깔리게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얼마 전 맨해튼 거리를 다시 찾을 기회가 있었는데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눈에 많이 띄어 뿌듯했다고.
* 금병주 LG상사 사장
#금병주 사장(60)은 LG상사에서만 32년간 근무하며 '상사맨 외길'을 걸어왔다.
그는 1970년대 일본에서 겪은 서러움을 잊지 않고 있다.
일본 현지 근무를 위해 집을 구하는데 일본인들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세도 놓지 않더라는 것.당시 그에게 일본 근무는 전쟁이었다고.그런데 이제는 일본에서도 한국 사람이라고 차별하지 않고,오히려 더 반기는 분위기가 됐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1964년 1억달러 수출에 불과하던 우리나라가 올해 세계에서 11번째로 '수출 3000억달러'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고 입을 모았다.
참석자들은 특히 환율·고유가·원자재난 등 3중고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시점에 이룬 성과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수출이 증가해도 고용 창출에 대한 역할이 미약하고,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이 감소되고 있는 점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참석자들은 따라서 혁신형 중소기업을 수출기업으로 육성하고 수출이 고용 창출에 기여하는 '수출의 질적 성장'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한국경제신문은 무역의 날(30일) 및 수출 3000억달러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7일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과 상사맨 출신 최고경영자(CEO)를 초청,'왕년의 수출역군에게 듣는다'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1964년 1억달러 수출에 불과하던 우리나라가 올해 세계에서 11번째로 '수출 3000억달러'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고 입을 모았다.
참석자들은 특히 환율·고유가·원자재난 등 3중고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시점에 이룬 성과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수출이 증가해도 고용 창출에 대한 역할이 미약하고,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이 감소되고 있는 점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참석자들은 따라서 혁신형 중소기업을 수출기업으로 육성하고 수출이 고용 창출에 기여하는 '수출의 질적 성장'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 사회 = 김상철 산업부장 ]
-수출 3000억달러 시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일익을 담당한 주역들로서 소감이 남다르실텐데요.
○정 장관=정말 꿈 같은 얘기다.
100억달러 수출에 1인당 1000달러 소득을 꿈으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무역 규모가 1억달러 이상이고 15개국 이상 수출을 해야 종합상사 면허를 정부에서 주던 때다.
당시 상사맨들의 구호는 '라면에서 미사일까지 수출한다'였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든 것을 취급했다는 얘기다.
○박 부회장=1964년 수출 1억달러 돌파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대통령은 물론 참석자 모두가 감동에 겨워하는 모습이었다.
1977년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할 때는 상사맨들조차도 기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 수출 3000억달러를 돌파했으니 감회가 새롭다.
양적인 면만 아니라 수출의 질도 변했다.
1960년대에는 철광석 무연탄 오징어를,70년대에는 합판 가발 등을,80년대에는 의류와 신발을 수출했다.
지금은 반도체 조선 자동차 등이 수출 주력 제품이 됐다.
○배 사장=1970년에 회사에 입사해 얼마 후 10억달러 수출을 맞이했다.
당시 모든 신문이 대서특필했다.
한국 사람들이 머리도 좋고 열정도 있었지만,무엇보다 '잘 살아야겠다'는 헝그리 정신이 기적을 이루는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수출전선을 뛰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를 소개해 주시죠.
○정 장관=인도에서 고생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시멘트 100만t을 인도 조달청에 공급하기 위해 인도 출장을 자주 갔는데, 항구에서 선박 적체가 심해 두 달 넘게 기다린 적이 있다.
나중에 막상 배가 왔는데 형편없는 선박이어서 좌절하곤 했다.
○박 부회장=노동집약적 제품 수출에 주력하던 국내 산업 현장에서 봉재 등 단순 노동을 통해 몸을 바쳐 수출을 일궈낸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관 주도형 수출구조 속에서 내 일처럼 지원했던 관료들의 정성도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금 사장=당시 수출을 위해 금융권의 지원이 최대 관건이었다.
은행의 대출과 협조가 수출 성사의 밑거름이 됐다.
기업,정부,금융권이 유기적으로 움직여 오늘날의 대업을 이룬 것이다.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불리는 '상사맨'의 경쟁력을 꼽으신다면.
○박 부회장=쉽게 말하면 '상사맨'은 사막에서 모래를 팔고 북극에서는 냉장고를 파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도전정신은 필수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 사람들 모두가 '상사맨' 기질이 있다.
한국인들의 도전정신과 자신감 등이 오늘의 수출 실적을 일궈낸 토대가 된 셈이다.
○배 사장='상사맨'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여겨진 게 사실이다.
팩스가 귀한 시절에는 갑자기 오더가 내려오면 근처 어디라도 뛰어가 업무를 처리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납기일 준수도 꼬박꼬박 지켜냈다.
바로 이런 게 '상사맨'의 경쟁력이다.
○이 사장='상사맨'은 몸을 던져 일했다.
외국에서 바이어들이 입국하면 유명한 식당을 찾아 술을 마셔야 했다.
지금은 이 같은 문화가 많이 사라졌지만 당시 요정이나 음식점에서 몸을 축낸 '상사맨'들이 적지 않았다.
―확대되고 있는 FTA(자유무역협정)와 국내 무역 환경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박 부회장=FTA를 하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국내 기업들은 그동안 엄청난 개방 파고를 경험하면서 문제 없이 극복해냈다.
물론 FTA를 통해 피해 업종이 있을 수 있지만 극복하고 헤쳐나가야 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발전을 위해서다.
단순한 관세 철폐나 수출 확대 차원이 아니라 국내 기업들의 기술 발전과 투자확대의 모멘텀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금 사장=조속한 참여에 동의한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시장을 가보면 대부분의 소비 제품이 '메이드 인 차이나'다.
이제 우리가 갈 수 있는 시장이 얼마 없다는 것이다.
기름이 있고 돈이 모이는 곳을 찾아야 한다.
FTA의 확대가 해답이 될 수 있다.
○정 장관=향후 국제 무역환경은 분업체계 및 산업 재배치의 가속화를 맞게 된다.
특히 FTA의 확대 등으로 10년 후 세계 교역의 약 70~80%가 FTA 역내무역이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무역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FTA 등 무역질서의 능동적인 참여가 절실하다.
―향후 수출 전망과 비전을 제시해본다면.
○정 장관=다행히 우리나라는 전 산업 부문에 걸쳐 고르게 경쟁력을 갖고 있다.
첨단 및 차세대 제품과 관련된 경쟁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5년 내 수출 5000억달러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교역규모 1조달러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도 수출 역군을 위해 박수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박 부회장=기술 개발,가격 경쟁력 확보,환율 문제에 대한 대책 등 모든 요인을 염두에 둬야 한다.
특히 선박,반도체 등 6대 전략 수출산업을 활성화시키고 부품소재의 원천기술 확보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 서비스산업 수출을 위한 묘안을 짜고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도 계속돼야 한다.
○이 사장=저임금을 통한 수출 시대가 가고 최근 고임금 수출 시대를 맞이했다.
문제는 국내 강성 노조가 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협력해야 수출 5000억달러 시대를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노사가 고통을 분담하고 서로의 발전을 위해 손을 맞잡을 수 있어야 한다.
정리=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
* 정세균 산업부 장관
# 정세균 장관(56)은 1978년부터 20여년간 '종합상사맨'으로 열정을 불태웠다.
정 장관은 당시를 '불가능이 없었던 시절'로 회상했다.
그는 퇴근 무렵 새로운 일이 떨어지면 귀가를 포기하고 회사 앞 여관을 찾았다.
통행금지 시간을 피해 일을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밤샘 근무를 마친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 곧바로 해외출장을 떠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박찬법 금호아시아나 항공부문 부회장
#박찬법 부회장(61)은 1969년부터 20년간 금호 무역부문 임직원으로 수출전선을 누볐다.
박 부회장은 해외 출장 때마다 하이타이(세제)를 챙겨 나갔다.
그는 일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욕조에 세제를 풀어 세탁을 한 뒤 냉난방기에 옷을 널어놓고 말렸다.
그러다가 방으로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말리던 옷을 황급히 치웠던 일이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 이연재 현대중공업 해양사업총괄사장
#이연재 사장(64)은 1967년부터 현대종합상사 등에서 수출 베테랑으로 활약했다.
인도 출장이 잦았던 이 사장은 무엇보다 먹거리 해결이 가장 힘들었다.
그는 어느 날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물어물어 찾아가 메뉴에도 없던 자장면을 주방장과 함께 직접 만들었다.
이 사장의 이름 이니셜을 따 'YJ누들'로 불려진 이 자장면은 당시 인도에서 음식으로 고생하던 삼성 대우 등 국내 기업의 수출맨들에게 최고 인기 식품이었다.
* 배영호 코오롱 사장
#배영호 사장(62)은 1970년부터 28년간 '상사맨'의 길을 걸었다.
1970년대 뉴욕지사 근무 시절 맨해튼의 패션 거리를 걸으며 배 사장은 분한 마음을 삭였다.
섬유제품부터 의상에 이르기까지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당시 그는 '언젠가는 한국 의류가 이곳에 깔리게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얼마 전 맨해튼 거리를 다시 찾을 기회가 있었는데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눈에 많이 띄어 뿌듯했다고.
* 금병주 LG상사 사장
#금병주 사장(60)은 LG상사에서만 32년간 근무하며 '상사맨 외길'을 걸어왔다.
그는 1970년대 일본에서 겪은 서러움을 잊지 않고 있다.
일본 현지 근무를 위해 집을 구하는데 일본인들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세도 놓지 않더라는 것.당시 그에게 일본 근무는 전쟁이었다고.그런데 이제는 일본에서도 한국 사람이라고 차별하지 않고,오히려 더 반기는 분위기가 됐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