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필리핀 메트로마닐라 마카티시의 은퇴청.이 건물 9층의 비자 발급 창구는 은퇴 이민 비자를 받으려는 외국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 일본 등지에서 온 아시아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유럽인들의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창구 직원들은 필리핀의 다른 관청과 달리 무척이나 친절한 태도로 이들을 맞고 있었다.

"은퇴 이민은 이 나라의 손꼽히는 외화가득원입니다.필리핀의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는 사업이지요.그렇다 보니 날씨가 더운 나라의 관청인데도 일본만큼이나 업무 처리 속도가 빠릅니다."

필리핀 파라냐케시에서 일본인 은퇴 이민자 타운 '엘리시움'을 운영 중인 C&S개발의 노로 가즈오 회장은 은퇴청의 분위기만 봐도 필리핀 정부가 이 사업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의 '캐시카우'

필리핀 은퇴산업은 이 나라의 최대 '캐시카우'(cash cow)'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퇴 이민자를 통해 달러화가 유입되고 일자리도 계속 창출되고 있어서다.

은퇴 이민 비자를 발급받는 외국인들도 매년 급증하고 있다.

2004년 933명이었던 은퇴 이민자는 지난해 1269명으로 늘었고 올해는 2000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메트로마닐라 '아얄라 알라방 빌리지'에서 만난 허정국씨.그는 가정부 2명에 운전기사 1명,가정교사 1명 등 모두 4명의 현지인을 채용했다.

다른 이민자보다 큰 집에서 살고 있는 그는 매달 집세로 150만원,한 달 생활비로 150만~200만원을 지출한다.

필리핀 정부는 미국 유럽 아시아 국가의 49세 이상 은퇴자(올해 4억명)를 타깃으로 잡고 있다.

이 가운데 0.1%를 필리핀으로 끌어온다는 목표다.

필리핀 정부의 계산대로라면 2015년이면 전체 은퇴 이민자 수가 86만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440억달러의 외화를 유치하고 일자리도 400만개나 늘어날 것이란 기대다.

이를 취약한 필리핀 경제와 비교하면 필리핀 정부가 은퇴 이민 사업에 목을 매고 있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필리핀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633억달러.외환보유액은 157억달러에 불과하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7억달러에 못 미친다.

끊임없는 무역적자에도 그나마 필리핀 경제가 파탄을 모면하고 있는 것은 인구의 10%인 850만명의 국민이 해외에 가정부나 건설근로자로 취업해 100억달러 남짓의 돈을 송금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은퇴자' 타깃

필리핀 은퇴산업의 경쟁력은 은퇴비자를 35세 이상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왕성한 소비와 투자로 필리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청년 이민자들을 은퇴이민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필리핀 정부는 이미 1985년 이 같은 제도를 도입해 전역을 앞둔 필리핀 주둔 미국 병사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은퇴 이민자들이 편안하게 머무는 데도 배려가 적지 않다.

단적으로 은퇴비자를 가진 외국인은 출입국 절차부터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아이들도 학생비자가 필요 없고 부모와 똑같은 ID가 나온다.

땅도 살 수 있고 지방은행 파이낸스회사 등에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은퇴청의 한국에이전트인 ㈜락소의 안성진 실장은 "취업비자의 경우 1년에 한 번 갱신할 때마다 100만원씩 들어가는데 은퇴비자는 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KOTRA의 손성만 마닐라 무역관장은 "필리핀은 아시아의 가운데 위치한 입지,영어사용 국가,살기 좋은 기후,저렴한 생활비 등 여러 자원을 한데 모아 은퇴산업이란 틈새시장을 발굴해냈다"며 "이 시장을 개발하고 마케팅하는 데 국가적 노력을 집중하고 있는 점을 본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공격적 마케팅 나서

은퇴청은 은퇴 이민자들의 불편을 줄여줄 수 있는 방안을 찾느라 열심이다.

지난 5월 말부터는 은퇴비자 신청시 예치금을 7만5000달러(35~49세의 경우)에서 5만달러로 대폭 인하했다.

예치기간도 6개월에서 한 달로 줄여 예치금의 부담을 줄여줬다.

지난달 중순에는 은퇴비자를 가진 이민자의 신속한 출입국 절차를 위해 공항에 별도의 창구를 신설했다.

필리핀수출지역관리청과 함께 실사를 벌여 은퇴자 빌리지를 개발하는 부동산 회사들에 최고 5년에 달하는 법인세 면제 혜택도 줄 계획이다.

또 필리핀 외환은행과 연계해 은퇴자들이 사업자금을 융자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마닐라(필리핀)=장규호 기자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