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오전 4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차를 몰던 김모씨(53)는 앞차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달려온 경찰은 김씨가 "음주 운전을 한 것 같다"는 피해자의 말만 믿고 김씨를 지구대에 데려갔다. 2시간 후 강남경찰서로 호송된 김씨는 갑자기 몸부림을 치며 쓰러졌고 경찰은 그제서야 김씨를 병원에 보냈다. 병원에 도착한 김씨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결국 이틀 후 사망했다. 김씨의 유족들은 "뇌출혈로 의식을 잃은 환자를 술에 취했다고 판단해 2시간이나 환자를 방치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유족의 손을 들어 국가가 2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뇌출혈이 발생하면 뇌압의 상승으로 토하는 경우가 많고 언어장애가 일어나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해 구별이 쉽지 않은 데도 경찰이 '음주 운전 사고'로만 본 데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고등법원의 시각은 달랐다.

서울고등법원 민사17부(곽종훈 부장판사)는 지난달 30일 김씨의 부인 강모씨(53)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가 주목한 것은 먼저 사고발생 직후 김씨의 상태. 재판부는 사고 직후 김씨의 행동이 술에 취한 상태와 매우 흡사해 피해자뿐 아니라 병원 응급실에 있던 의사도 일시적으로 술에 취한 상태라고 판단했다는 점을 꼽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사고 직후의 정황 등을 종합해 보면 경찰로서는 김씨가 교통사고로 인해 뇌출혈을 입게 돼 생명에 위험이 있는 상태였다고 예견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사고 직후 김씨가 병원으로 후송됐다 할지라도 사망할 가능성이 44%에 이를 정도였다"며 "경찰이 응급조치를 취하지 아니했다 하여 김씨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