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3조원을 자랑하는 팬택이 워크아웃에 들어갈 것이란 소식이 전해진 11일 정보기술(IT) 업계에는 '중견기업 위기론'이 팽배했다.

중견 디지털기기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란 정말 불가능한 것이냐는 자괴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일부 중견기업은 악소문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취재전화도 받지 않았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외환위기도 아닌데 매출 3조원 회사가 휘청대니 정말 걱정"이라며 "환율 급락에 팬택 소식까지 겹쳐 연말 IT시장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고 전했다.

IT 분야 중에서도 휴대폰,PC,MP3플레이어 등 디지털 기기는 중견 기업들이 생존에 유난히 어려움을 겪는 분야다.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성장하더라도 해외 시장에서의 저가 공세에 무너지거나 대기업의 마케팅 공세 한방에 나가떨어진다.


< 올 VK 부도 … 매년 휴대폰 업체 쓰러져 >

휴대폰 부문에서 중견기업의 존재는 무의미해졌다.

팬택이 워크아웃 등에 들어가면 남은 중견기업은 없다.

세원텔레콤 텔슨전자 VK 등이 중국의 저가 공세에 이미 무너졌다.

디자인 가격경쟁 글로벌마케팅 유통망 모든 부문에서 생존할 수 없는 처지다.

이들이 생존해 저가 휴대폰 시장을 노린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노키아 모토로라 등 글로벌기업들이 인도 중국 등 신흥시장에서 브랜드파워를 앞세워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더이상 우리나라에서 중견 휴대폰 기업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팬택이 생존한다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휴대폰 산업은 중견기업들의 피의 역사라고 말하는 전문가가 많다.

벤처거품이 꺼지던 2002년부터 거의 매년 중견 휴대폰 제조업체들이 쓰러졌다.

2002년 와이드텔레콤을 시작으로 2003년 이론테크,2004년에는 세원텔레콤 모닷텔이 줄줄이 부도를 냈다.

2004년 텔슨전자가 화의를 신청한 데 이어,올해 들어선 지난 7월 중견 휴대폰 제조업체 VK가 최종 부도를 맞았다.

VK의 사례는 일찌감치 해외 시장에 진출한 중견업체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VK는 삼성 LG보다 먼저 중국 정부로부터 휴대폰 생산·판매 라이선스를 따내 성공했다.

그러나 중국이 휴대폰 시장을 개방하자 유럽 미국으로 나가야 했다.

하지만 유럽 미국에는 글로벌 업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VK는 노키아 모토로라 등이 저가 공세를 펼치자 한순간에 코너로 몰렸다.

세원텔레콤과 텔슨전자가 쓰러진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원이나 텔슨은 주로 중국에 휴대폰을 수출해 돈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수백 개,수천 개 기업이 휴대폰 시장에 뛰어들었고 급기야 도저히 이익을 내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미처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기도 전에 파국이 닥쳤다.

< 삼보.현주, 좁은 내수시장서 '허우적' >

PC 시장에서는 삼보컴퓨터와 현주컴퓨터가 삼성전자 LG전자 델 HP 등 글로벌 플레이어들 틈바구니에서 고전하다 어려움을 겪었다.

현주컴퓨터는 좁은 내수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대기업의 공세가 이어지고 PC 시장이 성숙해지면서 비용절감 및 시장 다변화에 실패한 현주컴퓨터는 바로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2004년 매출이 전년도의 절반 수준인 1573억원으로 급감하고 182억원의 대규모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삼보컴퓨터는 국내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뒤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 등 개발도상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에 밀렸다.

글로벌 업체들은 업그레이드된 제품을 가격을 낮춰 내놓았다.

개발도상국 업체로부터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생산한 제품을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내놓기도 했다.

결국 삼보컴퓨터는 해외에서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며 법정관리를 받게 됐다.

PC업계는 좁은 내수 시장의 한계가 업체들의 발목을 붙잡았다고 지적한다.

중견업체들이 충분히 경쟁력을 키울 만큼 시장이 크지 않다는 것.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해외 진출을 시도했지만 글로벌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국내에서는 대기업들이 브랜드 파워와 마케팅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했다.

휴대폰 PC 등 디지털 기기 분야에서 중견기업들이 잇따라 고배를 마시자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벤처기업 때와는 달리 몸이 날렵하지 않아 변화에 빨리 대처하지 못한다.

대기업처럼 자본과 기술을 충분히 갖추지 않아 빠른 시일 내 경쟁력을 확보하지도 못한다.

우수 인재 확보에도 상대적으로 불리하고 규모의 경제에도 도달하지 못해 비용절감에도 실패하기 일쑤다.

그동안 많은 중견 디지털 기기 업체가 가격 경쟁력,품질 경쟁력을 갖추는 데 실패해 쓰러졌다.

자본과 인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디지털 기기 산업에서 필수적인 발빠른 기술 개발도 해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중견 디지털 기업의 위기다.

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