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주가 제품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를 소비자가 '듣고 싶은 얘기'로 만들어주는 사람.광고회사 웰콤의 아트 디렉터 채병호 상무(44)가 말하는 '광고 디자이너'의 정의다.

'광고 디자이너'란 지면이나 텔레비전 광고에서 모든 시각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카피라이터가 언어로 승부한다면 광고 디자이너들은 이미지로 제품을 알리는 것.카피라이터가 소비자의 '귀'를 사로잡을 문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면,광고 디자이너는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을 시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광고와 디자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함께 광고 제작 과정을 기획하고 감독해야 하는 역할도 있기 때문에 요즘은 광고 디자이너라는 말보다 '아트 디렉터'라는 용어가 좀더 많이 쓰이고 있다.

컴퓨터를 이용해 시각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작업이 수월해지다보니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생각하는 사람'의 개념이 강해진 것이다.

"영화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의 멜 깁슨이 맡은 역할이 아트 디렉터예요.

제품 혹은 브랜드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각적인 효과를 생각해 내잖아요."

채 상무는 1988년 중앙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뒤 지금까지 광고 디자이너 한 길만 걸어왔다.

그의 손을 거쳐간 광고만 해도 대략 300여개 작품.그 중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것은 남성화장품 '꽃을 든 남자'의 '피부가 장난이 아닌데' 시리즈,맥주 카스의 '톡' 시리즈,르노삼성자동차 SM5의 '남다른 매력' 김혜수 편,르노삼성자동차 SM7 '함부로 쳐다보지 마십시오' 시리즈 등이다.

'꽃을 든 남자'는 처음으로 남성들의 피부에 관한 관심을 표현했다는 점에서,맥주 카스의 '톡' 시리즈는 맥주를 마시는 장면보다 뚜껑이 열리는 장면에 초점을 뒀다는 점에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르노삼성자동차 시리즈는 이전 자동차 광고에서는 중년 남성층을 겨냥해 중후한 느낌의 검정색 자동차를 등장시켰던 것과 달리 '젊은 사람이 모는 세단'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은색 자동차를 쓴 파격적인 광고였다.

그는 요즘 광고에서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인사이트(insight)'를 잡아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통찰'이지만 광고계에서는 통상적으로 '소비자 자신도 모르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욕망'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광고는 소비자들이 제품을 갖고 싶어하는 욕망을 일깨우되 '진부'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0년께부터 남자들도 피부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사회 분위기상 피부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직접 드러내기가 어려웠던 상황.

그때까지 남성 화장품 광고는 근육질의 남자가 웃옷을 벗은 채로 터프하게 스킨을 바르는 장면이 전부였다.

하지만 채 상무가 만들어낸 꽃을 든 남자의 '피부가 장난이 아닌데' 시리즈는 남자들도 여자와 다를 바 없이 피부가 좋은 사람을 부러워할 수 있다는 욕망을 잡아냈다.

히트 광고를 많이 만들어낸 채 상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뭘까.

광고의 '데드라인'이라고 한다.

인간의 머리가 자판기가 아닌 이상 항상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는 없는 탓에 광고주에게 광고 시안을 보여줘야 하는 데드라인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게 아트 디렉터의 '숙명'이다.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 때는 밤샘 작업을 하는 일도 많아지다 보니 생활이 불규칙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따라서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 자체를 즐기지 않으면 광고 디자이너 생활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다고 해서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팀원들과 영화나 그림을 보러 가는 일도 많아요.

남들이 보면 놀면서 일한다고 하지만 회사 밖에 나가서도 모든 생활을 광고 아이디어에 연결시키느라 머리 속은 늘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죠."

그는 광고 디자이너는 50%의 노력과 50%의 재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냉정한' 직업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다른 직업보다 노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범위가 좁다는 것.하지만 채 상무는 재능보다는 피나는 노력으로 승부한 사람이다.

그가 내세우는 것은 특이하게도 '개똥'철학.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듯 평소에 생각해둔 아이디어도 막상 활용하려고 할 때는 생각이 안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마다 노트 한 귀퉁이 혹은 껌 종이에 그린 한 컷의 그림들을 모두 모아둔다.

"그런 한 컷의 그림을 '섬네일(thumb-nail·엄지 손톱)'이라고 해요.

대부분 문득 생각난 것을 엄지 손톱만하게 그려두기 때문이죠."

제품에 관한 공부도 필수.여기서 그는 '연인론'을 내세운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려면 서로에 대해서 알아야하듯 제품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면 광고 디자이너도 제품을 꼼꼼히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괴로웠던 때는 맥주 광고를 맡았을 때.평소 술을 즐기던 그였지만 제품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주야장천(晝夜長川) 맥주만 마시다보니 늘 어지러운 상태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채 상무는 직업의 특성상 가족들한테 미안한 일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이 만든 광고를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이젠 세계 최고 광고제인 '칸 광고제'에서 좋은 상을 타는 것이 목표예요.

그게 두 아들에게 주는 선물일 것 같기도 하고요."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