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 < 소설가 >

연말이 가까워오자 예상대로 도처에서 술자리 초청 전화가 쇄도한다. 이곳저곳 눈치가 보여 안 갈 수도 없고,가자니 겹치기 출연에 연일 강행군을 해야 하는 스케줄이 되기 십상이다. 2005년의 예를 들자면,거짓말 보태지 않고 13일 동안 날마다 모임에 가고 날마다 음주를 한 끔찍한 경험이 있다. 안 가면 그만이지만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돌고 도는 술잔을 물리치기 어렵다는 건 세상의 모든 술꾼이 다 아는 관성일 터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술을 많이 마시고 자주 마신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독한 술 소비량 세계 4위 국가로 1년에 국민 1인당 소주 72병,맥주 108병을 소비하는 놀라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기 안에서 소비된 술이 소주로 환산해 200만병 분량이라니 더 이상의 언급은 사족이 될 터이다. 음주자 3명 중 1명은 일주일에 3회 이상 술을 마시고,그중 55%는 마실 때마다 2차,13%는 3차까지 간다고 한다. 자아망실 행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인가,젊은 날부터 같이 술을 마셔온 주당들이 심각하게 허물어져 가는 걸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게 된다. 물론 술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이 되어 직장도 그만두고,가정도 깨지고,건강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술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고,술로 인해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행적으로 눈을 감아 주려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와 같은 경향이 술자리에서 무조건적 음주 강요와 '먼저 가는 사람=배신자'라는 기이한 등식을 만들어낸다. 뿐만 아니라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1차,2차,3차를 거치며 '오늘 마시고 죽자'는 극단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당연히 그 다음날은 음주 후유증으로 망가진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30년 동안 술을 마셨다. 10년은 문학 지망생으로 살고, 나머지 20년은 작가로 살았으니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술을 마셨을 것이다. 얼마 전 음주 경력 30년을 기념하여 도대체 내가 어느 정도의 술을 마셨을까,셈을 해 본 적이 있다. 대학에 입학하던 갓 스물부터 30년 동안 도대체 몇 날 동안 얼마나 많은 술을 나는 마신 것일까.

날수를 헤아려 보니 30년이면 1만950일.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일주일에 3일 이상은 술을 마셨을 테니 날수로 치면 4320일 이상 술을 마셨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었다. 한번 술자리를 시작해서 일차로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마신 술의 양을 계산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나는 지난 30년 동안 내가 마신 술의 양에 대해 이런 표현을 찾아냈다.

'쌓으면 산이 되고 부으면 바다가 되리.'

30년 세월 1만950일 중 4320일을 마셨다는 건 8640일을 술로 날렸다는 얘기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술을 마시면 폭음을 하게 되니 다음날 하루가 부록으로 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계산을 들여다보니 술을 마시지 않고 온전하게 보낸 날은 고작 1310일뿐이라는 어이없는 결론이 나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이후의 30년 인생 중 10분의 9가 술로 인해 바스러졌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술맛을 잃어버렸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나름대로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가고,어떻게든 세상에 이바지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마땅한 일이거늘 그토록 허다한 날을 술로 소모했다는 건 정말이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정치가 개판으로 돌아가고,부동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직장 문제로 오장육부가 뒤틀린다고 해도 우리가 마시는 술은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술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술이 나를 컨트롤한다. 나는 그것이 기분 나쁘고,술로 인해 추하게 늙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가 싫다.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 너무나 소중한 시간들이 술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버린다. 우리가 술을 위해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면 술에 멱살을 잡혀 습관적으로 술집으로 끌려가는 의지박약한 초상은 이제 그만 지워버려야 한다. 30년 중에 고작 1310일을 맑은 정신으로 살았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그날 이후,나는 술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