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진출을 추진중인 국내 A증권사는 최근 현지 비상장 국영기업과 접촉하면서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귀 증권사는 한국내에서 몇 위인가요?" A증권사 관계자는 "한국 시장내 점유율이나 IPO(기업공개) 성공사례 등을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곤혹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김종선 대우증권 홍콩법인장은 "국내 증권사들이 해외에 진출하는 데 최대 애로사항은 '트랙 레코드'(track record)라고 불리는 과거 성적표"라고 말했다.

삼성증권의 경우 외국 기관 대상의 국내 주식 세일즈가 먹히는 것도 나름대로 '트랙 레코드'를 쌓아온 덕분이다.

임춘수 해외영업본부장은 "아시아머니지(誌)로부터 외국계를 제치고 한국내 리서치 주식영업 등에서 1위로 꼽힌 뒤부터 해외영업이 훨씬 쉬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들어 해외시장 진출이 증권업계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국내 시장을 먼저 장악하지 않고 해외를 공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손복조 대우증권 사장은 "이미 10년 전에도 국내 증권사들은 너도나도 '해외로,해외로'를 외치며 세계 곳곳에 지사를 세웠지만 결과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비용을 낭비한 꼴이 돼버렸다"며 "철저한 준비없이 해외로 나갈 경우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국내 IB(투자은행)시장은 여전히 외국계의 손에 휘둘리고 있다.

○국내 안방은 외국계 차지

국내 M&A(인수·합병)시장 '대어(大魚)'로 꼽히는 대한통운의 인수전에서 사실상 최대 수혜자는 미국계 증권사인 골드만삭스다. 골드만삭스는 M&A 본게임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2004년 대한통운의 보증 채권을 발빠르게 인수한 후 올들어 지난 6월 출자전환을 통해 이 회사의 지분 20.6%를 확보한 최대주주가 됐다. 골드만삭스가 보유지분을 현재가격으로 넘긴다 하더라도 최소 4000억원 이상의 평가차익을 거둘 것이라는 게 업계의 추산이다. 자본력이 부족한 국내 증권사들이 '그림의 떡'을 보며 손가락만 빨고 있는 사이 골드만삭스는 직접 자기자본을 투입해 국내 대형 증권사가 한햇동안 벌어들이는 순이익 만큼의 돈을 단 한번에 벌어 들이고 있는 셈이다. 사실 대한통운뿐 아니라 국내 M&A 시장의 핵심 물건들이 대부분 외국계 차지가 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 3분기까지 국내 M&A 자문시장에서 상위 10위 증권사 중 6개사가 JP모건 UBS 메릴린치 등 외국계였다. 국내기업의 국내 및 해외 IPO 주간사 순위에서도 상위 5위권 내에 드는 국내 증권사는 단 한 곳에 불과하다. 심지어 국내 증시에서 이뤄지는 상장사들의 주식 블록세일(대량매매)이나 증자에서도 상위 5위중 외국계가 1,3,5위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자본력 부족을 꼽고 있다. 국내 45개 증권사들의 자기자본 총액은 작년 말 현재 19조8000억원으로 미국 메릴린치 자기자본(31조원)의 64% 수준에 불과하다. 조성훈 증권연구원 연구위원은 "푼돈(주식중개 수수료)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단계에서 벗어나 큰 돈이 되는 고부가가치 비즈니스에 뛰어들려면 자본력이 필수인데,자본력 게임에서 국내 증권사는 한참 뒤처져 있다"고 말했다.

수수료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수익구조에도 한계가 있다. 국내 증권사들의 전체 수익에서 위탁매매 수수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61%로 미국 11%,일본 31%에 비해 턱없이 높다. 조 연구위원은 "증권사들이 허약한 자기자본을 채우는 현실적인 방법은 이익을 쌓는 것 밖에 없는데 경쟁심화로 수수료는 계속 하락하고 있어 새로운 수익원 창출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증권산업에 대한 과도한 규제도 문제로 꼽힌다. 황건호 증권업협회장은 "지나치게 엄격한 칸막이식 업무 구분과 은행 중심 시스템으로 인해 국내 증권산업은 창의적인 업무기회를 박탈당하고 이는 수수료 기반의 사업에만 몰두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증권사 입장에서는 M&A 등을 통한 대형화와 전문화,수익 다변화와 함께 금융 전문인력의 자체 양성에 적극 나서고,정부로서는 자본시장통합법의 조속한 시행을 통해 은행과 자본시장이 상생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게 핵심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