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서울 청계천변 동평화시장 3층의 한 남성의류 매장.백화점에서 팔리는 브랜드의 와이셔츠가 한 장에 50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게 주인 정 모씨와 손님 간 흥정이 시작됐다.

"2000원에 줘요."(손님) "그럼 10벌 사실래요?"(주인) "알았어요.

색깔은 골고루."(손님) 정말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런데 값을 부르는 건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점이 보통의 경우와 달랐다.

와이셔츠를 더 꺼내러 위층 창고로 가는 정씨를 따라가봤다.

그의 창고 속에 가득차 있는 유명 브랜드옷들은 올 가을·겨울 패션업계가 맞은 찬바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케 했다.

정씨는 "올해는 물량이 하도 많이 밀려 들어와 창고에 더 집어넣을 공간이 없을 지경"이라며 "이러니 사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값은 따지지도 않고 판다"고 말했다.

올해는 패션업체들이 긴 장마,더웠던 가을 날씨 등의 여파로 추동 의류 장사를 죽쒔다.

자금 압박에 시달리는 업체들이 현금 마련을 위해 자사 브랜드 옷을 대거 '땡처리'하면서 동평화시장 등 서울 동대문 일대 의류 덤핑 시장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물량이 풀렸다.

창고가 미어터질 듯 밀려드는 옷을 감당하지 못한 상인들이 '일단 팔고 보자'는 식의 염가 판매에 나서고 있다.

동평화시장상인회에 따르면 11월부터 이날까지 반입된 '땡 의류' 물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배가량 늘었다.

원래 가격표가 붙어 있는 옷의 경우 정가보다 평균 90% 할인된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오병채 동평화 4층(도매) 상인회장은 "반입물량은 늘었지만 서민층이 대부분인 손님들의 발길은 뜸해 수급 불균형이 심각하다"며 "그러다보니 열 장,스무 장씩 한꺼번에 산다는 사람만 있으면 셔츠 카디건 등은 한 장에 1000~2000원,겨울 점퍼는 5000원까지 파는 경우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백화점에서 100만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는 캐시미어 코트 등도 흥정만 잘하면 20만원에 살 수 있다.

이 시장에서 취급하는 물건은 크게 두 종류.내수 패션 브랜드를 갖고 있는 업체가 자금 경색을 피하기 위해 내다 판 브랜드 옷과 수출업체가 판로가 막히면서 급처분한 보세의류가 반반씩 분포한다.

최근에는 중국의 봉제업체들이 주문량보다 초과 생산한 물량을 이쪽으로 넘기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 같은 덤핑 물량은 전국 각지의 체육관,구민회관 등을 빌려 '기획특가전' 같은 이름으로 땡처리 판매하는 행상들에게 넘겨지고 남은 것은 이 시장에서 소매로 판매된다.

브랜드 옷의 경우엔 업체가 보통 목 뒤에 있는 라벨을 떼어 넘겨주기 때문에 옷에 붙어 있는 가격 꼬리표를 통해서만 어느 브랜드 제품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라벨이 떨어진 경우라도 앞가슴 등에 박음질로 새겨진 로고는 대부분 남아 있다.

구입 후 '목 뒤 라벨'을 다시 붙이기 원하면 라벨 가게에서 500~1000원에 파는 것을 사다가 1층에 몰려 있는 수선집에서 박음질하면 된다.

엄격히 따지면 상표법 위반이라 판매 상인과 잘아는 수선집이 아니면 해주기를 꺼린다.

상인들은 나중에 정상 매장에서 교환을 요구하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전했다.

보세 의류는 40~50대 중년층이 입을 만한 제품이 많다.

젊은층 타깃의 보세옷은 동대문 일대 패션몰에서 미끼상품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아 덤핑 의류 시장엔 잘 나오지 않는다.

지방 상인들을 상대로 한 도매 판매를 하는 지하층과 4층은 오시 9시에 문을 열어 다음날 오전 6시에 폐점한다.

도매 가게라도 최근에는 낱장 판매를 병행한다.

1~3층의 소매 점포는 반대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가 영업 시간이다.

주차는 동대문 풍물시장(옛 동대문운동장)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물건을 구입하기만 하면 서울시가 상인들에게 공짜로 나눠 준 2시간짜리 주차할인권을 받을 수 있다.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