咸仁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요즘 이곳 저곳에서 송년(送年) 모임이 한창이다. 한때는 망년회(忘年會)란 표현이 자주 등장했건만,'올해를 송두리째 잊어버리자' 외치기보단 '올해를 의연하게 보내기로 하자'는 다짐이 듣기에 한결 나은 것 같기는 하다.

하기야 우리네 삶을 돌아보건대 빨리빨리 잊지 않으면 곤혹스러움과 황당함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우니,가버린 시간 연연하지 말고 오가는 술잔 속에 묻어버리고픈 유혹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일지 모르겠다.

정신분석학과 영성(spirituality)의 통합을 탁월한 설득력과 빛나는 통찰력으로 담아낸 저서 '가지 않은 길'이 무려 2년 이상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면서,저술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 스코트 펙 박사는 '가지 않은 길 후기(後記)'란 속편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후 1년 내내 미국 전역을 돌며 강연할 기회를 갖게 된 그는,덕분에 사춘기 청소년으로부터 변호사,의사,대기업 최고경영자(CEO) 등을 거쳐 교도소 재소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한다.

무수히 많은 강연을 반복하는 동안 그는 매번 강연이 끝날 즈음 청중들을 향해 동일한 질문,"당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입니까?"를 던지곤 했다 한다. 그 때마다 신기하게도 유사한 패턴의 반응이 나오곤 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곧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낙오된 집단일수록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당신이 알 바 아니오(None of your business)"라며 냉소적 반응을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린 반면,사회적 성공과 인정, 그리고 만족한 삶을 누리는 집단일수록 오랜 시간 숙고를 거듭한 끝에 답을 써 내려가곤 하더라는 것이다. 그 때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 답은 "나 자신,내 인생,그리고 가족"이었다 한다.

이제 또 어김없이 한 해를 보내자니 무언가 잊을 거리를 찾기보다 오래도록 기억할 거리를 찾고픈 심정이 간절해온다.

올 봄 조카 녀석이 결혼하던 자리에 초대를 받아 미국의 미들베리란 작은 마을을 다녀온 일이 있다. 그 때 우리 가족은 고객의 취향을 세심하게 배려한 안락하고도 아기자기한 여인숙에 묵게 되었는데,그 곳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첫날 의외의 감동스러운 장면을 만났다. 우리 가족 중 청각 장애인이 있었는데,아침 식사 주문을 받는 웨이트리스가 제법 능숙하게 수화(手話)를 구사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매일 아침이면,왠지 마음이 따스해오고 얼굴엔 환한 웃음이 번지곤 했던 순간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올 가을,제자들이 모여 1년 전 폐암으로 돌아가신 스승을 추모하는 자리를 마련했던 것도 가슴에 남겨두고픈 기억이다. 졸업생들 이력(履歷)이 다채로운지라,분쟁지역 전문 PD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제자는 선생님 생전의 사진들을 모아 눈물겨운 드라마를 엮어냈고,목사 안수를 받은 제자는 선생님과의 인연을 돌아보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시금 새길 수 있는 화두(話頭)를 풀어 나갔다.

저마다 바쁜 일상에 쫓겨 정작 사람 구실 제대로 못하고 살지만,그냥 지나갔더라면 선생님께 참으로 죄송했을 것 같은 마음을 나누며,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던 순간이 어느새 아련하다.

물론 후회 한 점 없는 삶이 있을 리 있나. 병든 아버님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변변치 못함도 후회스럽고,'환할 때 집에 와서 놀아 달라'고 조르는 손자 녀석과의 약속을 번번이 어기는 주변머리 없음도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은 1년에 한 번만 만나도 친구'라더니,정작 보고 싶은 이들은 뒷전이고 실속 없이 바쁘기만 한 것도 민망하고,'한 달에 최소한 한 번은 문화 공연을 즐기자'고 약속해 놓고선 공수표(空手票)를 날린 것도 반성한다.

새해엔 속절없는 후회나 애꿎은 반성 대신 삶의 중요한 그 무엇을 잊지 않는 여유와 소소한 일상 속에서나마 의미 있는 순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