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화폭입니다."

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의 이기석 우표디자인실장(43)은 우표를 이렇게 정의한다.

500원짜리 동전크기지만 그 안에는 아름다운 디자인과 함께 다양한 주제가 담겨 있다는 설명이다.

'3cm의 예술작품'이라고도 했다.

이 실장은 한국의 대표적인 우표 디자이너다.

우표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우표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다소 생소하다.

희소성 때문일까.

우표 디자인실은 국내에 단 한 곳밖에 없다.

디자이너도 7명뿐이다.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는 직업이다.

입사 경쟁률도 치열하다.

하지만 공무원 정원 때문에 빈 자리가 생겨야 채용이 이뤄진다.


우표에는 우리나라의 자연과 역사,문화,인물,주요 이슈 등이 담긴다.

디자이너로서의 미적 감각과 창의력도 중요하지만 문화와 역사를 정확히 알리는 사관(史官)의 역할도 해야 한다.

이 실장은 "국가 이미지를 형성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명감이나 책임감 없이는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표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랜 시간과 작업을 거쳐 완성된다. 우표의 주제는 1년 전에 결정된다.

유행이나 감각을 중시하는 일반 상업 디자인과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자문과 고증은 필수다.

문헌자료 검색과 현지 답사도 디자이너 몫이다.

이 실장은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성이 생명"이라며 "명산 시리즈를 할 때는 디자이너가 계절마다 3∼4번씩 산에 올라가 확인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기 위해 며칠씩 산속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실장은 우표 디자이너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인하대 사범대 미술교육학과를 나왔다.

하지만 선생님보다는 광고 디자이너를 꿈꿨다.

"광고 디자인을 통해 인간의 삶과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 거라는 포부가 있었죠." 그래서 광고회사에 들어갔고 홍익대 광고홍보대학원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랬던 그가 우표 디자인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서울에서 열린 만국우편연합 총회의 홍보물 디자인 작업에 참여했다가 우표의 매력에 빠져 우표 디자이너 길을 걷게 됐다고.

2004년 한·일 외교문제로 비화된 '독도 우표'는 이 실장에겐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우표의 주제는 독도의 자연이었다.

독도가 단순한 돌섬이 아니라 다양한 생물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획한 것이다.

갯메꽃과 왕해국 슴새 괭이갈매기 등 독도의 희귀종이 소재였다.

하지만 일본이 트집을 잡고 나섰다.

"2002년 독도 우표가 발행됐을 때는 이슈가 안 됐는데 우리 영토에 자생하는 동·식물을 담은 우표를 일본이 문제삼아 화도 나고 당황스러웠죠." 하지만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우표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좋은 기회가 됐다.

우표 디자인실에는 전국에서 격려 전화가 빗발쳤고 우표는 발매한 뒤 두 시간 만에 매진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2002년 태극전사들의 월드컵 4강신화를 기념한 우표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하지만 좌절도 있었다.

한류 스타를 우표에 담아 세계에 알리자는 기획을 했지만 초상권과 지식재산권 문제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대안으로 내년에 영화시리즈 우표를 발행한다.

아리랑부터 1000만 관객을 넘은 작품까지 우리 영화 역사를 우표에 담아낼 계획이다.

이 실장이 요즘 고민하는 것은 우표의 미래다.

정보기술에 우표를 접목하고 이메일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 어필할 수 있는 우표를 만드는 것이다.

인터넷과 택배 등의 발달로 우표 사용량은 크게 줄었다.

예전에는 만들면 팔렸지만 지금은 팔리게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우표를 마름모나 세모꼴로 제작하거나 향기나는 우표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우표 디자인에 반영되고 있다.

'나만의 우표'도 젊은층을 겨냥한 것이다.

"우표가 붙어 있으면 우편물 개봉 효과가 두 배로 높아진다고 합니다.

고객에게 보내는 우편물에 독특한 우표를 붙여 매출액이 늘었다는 기업도 있어요.

단순한 광고 홍보물이 아니라 고객에 대한 정성을 담은 메신저 역할을 우표가 하고 있는 거죠." 그는 우표가 훌륭한 홍보 매체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또 우표의 르네상스 시대는 다시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1970,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우표 한두 장쯤 모아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새 우표가 나오는 날이면 우체국 앞은 수집가들로 장사진을 이뤘어요." 이 실장은 "이메일과 휴대폰 메시지가 홍수를 이루고 빠른 커뮤니케이션이 강조되는 시대지만 정성스럽게 쓴 편지와 우표가 진정한 값어치를 지니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했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