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들이 지난해 한국사회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밀운불우(密雲不雨)'를 꼽은 이후 주요 대선주자들과 정당들은 경쟁적으로 '한천작우(旱天作雨)' '구동존이(求同存異)' '운행우시(雲行雨施)' 등의 성어를 선보였다. 이어 김성호 법무부 장관은 신년사에서 불교참선 용어인 '각하조고(脚下照顧)'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를 인용했다. 정상명 검찰총장은 논어에 나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강조했다. 이들 사자성어 상당수는 해설 없이는 뜻을 추측하기가 여간해선 쉽지 않다.
사자성어 붐은 경제계로도 번져 회사 경영진들이 신년화두로 '선우후락(先憂後樂)''근고지영(根固枝榮)''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 등을 사원들에게 강조했다.
모두들 그 어렵다는 주역과 논어,맹자를 비롯 도덕경,손자병법까지 경쟁적으로 '원문'을 뒤져 새해를 예견하고 지나간 세월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 본다면 한국인들은 모두 동양고전에 박식한 '철학자와 시인의 민족'으로 비쳐질 정도다.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소위 '리더'들이 앞다퉈 고전을 인용하는 것을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과거 문민정부 시절 박준규 국회의장이 YS에게 버림받자 내놓은 '토사구팽(兎死狗烹)'처럼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지도 못하고,'촌철살인(寸鐵殺人)'의 묘미도 없으니 먼지나는 전적을 뒤진 보좌진들만 헛고생했다는 생각이 앞선다. 또 일부 고사성어의 경우 말하는 사람이 정확한 뜻을 알고나 한 것인지 의심이 들기도 하고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구석도 있으니 문제다.
무엇보다 높으신 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든 일반인들로선 사회의 리더들이 꼭 이런 식으로 유식을 뽐내야 하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사회 리더들이 어려운 성어의 '겉멋'이 아니라 그속에 담긴 뜻을 살리는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길 기대해 본다.
김동욱 사회부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