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토그램(pictogram).그림을 뜻하는 '픽토(picto)'와 전보를 뜻하는 '텔레그램(telegram)'의 합성어로,사물·시설·행위·개념 등을 상징화된 그림문자(pictograph)로 나타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빠르고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을 말한다.

고속도로와 공장 지대의 안전 표지판부터 지도에 있는 목욕탕과 절 표시까지 모두가 픽토그램이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 글을 모르는 평민들은 그림으로 성경 이야기가 표현된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색유리를 이어 붙여 만든 무늬나 그림)를 보고 성경을 공부했던 것처럼,이 시대의 사람들은 생활 속의 수많은 픽토그램을 통해서 행동의 방향을 잡는다.

박진숙 세종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가 픽토그램을 만드는 이유도 이 때문.그는 픽토그램이 사람들의 지식과 자라온 문화에 상관없이 누구나 안전하고 쉽게 행동의 방향을 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보통 디자인이 갖는 '장식'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 또한 그가 생각하는 픽토그램의 매력이다.

박 교수는 원래 CI(기업이미지) 디자인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2002 FIFA 월드컵 개막식 수묵 영상 및 공식 브로슈어 디자인,한신대학교,삼성 타워팰리스,현대건설 등이 그가 만든 대표적인 작품이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개최한 뒤 각종 픽토그램의 표준화 작업의 필요성을 느낀 정부가 2003년부터 공공안내 그림픽토그램 국가표준화 사업을 시작해 박 교수에게 이 일을 맡겼다.

시각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이긴 하지만 한국을 비롯해 세계적 기준에도 맞는 픽토그램을 만든다는 것은 CI 작업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 대한 도전이었다.

CI는 독특하면서도 튀어야 하지만 픽토그램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보편적이어야 했다.

지하철에 있는 노약자와 임산부 표시를 고안할 때도 수백장의 사진과 그림을 비교해 가며 행동과 몸의 특징을 파악해나갔다.

"혐오스럽게 그리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자신을 표현한 그림을 보고 수치스럽거나 불쾌한 기분을 가지면 안 되죠."

도구가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귀마개 착용'을 뜻하는 픽토그램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통용되던 귀마개를 착용하고 있는 사람의 정면 모습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실험 결과 이 그림을 보고 방한 모자를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그는 얼굴의 측면 모습으로 바꿔 그려 사람들의 이해도를 높였다.

박 교수는 ISO(국제표준화기구)가 채택한 각종 픽토그램 속에서도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현재 ISO가 지정한 국제표준 중에는 픽토그램의 역사가 긴 독일과 영국에서 만든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의사를 나타낼 때 유럽에서는 보편적으로 뱀이 지팡이를 말아 올라가고 있는 모양을 픽토그램 안에 그려 넣는다.

이 문양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를 상징한다고.

그는 병원과 같은 중요한 픽토그램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ISO의 다른 유럽 회원국들은 이에 대해 전혀 문제점을 느끼고 있지 못했던 것에 놀랐다고 한다.

박 교수가 수정한 것은 청진기를 끼고 있는 사람의 얼굴 모양."우리나라 사람이 유럽으로 여행 갔을 때 가뜩이나 외국어도 어려운데 비주얼 랭귀지(Visual language·시각언어)까지 배워야 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겠어요? 픽토그램만큼은 강대국와 약소국의 차이 없이 인류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그는 3년 동안 국내 200개 픽토그램을 만드는 작업을 주도했다.

이 가운데 '사용 후 전원 차단','의료용 보안경 착용','관계자 외 출입금지','인화물질 경고',' 머리 위 장애물 주의','밀지 마시오','손을 씻으시오' 등 6개와 8개의 픽토그램이 각각 2004년과 2005년에 국제표준으로 채택됐다.

2005년에 채택된 8종은 ISO가 지정한 '작업장 및 공공장소의 안전표지'로 선정된 16종 그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박 교수는 디자인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도 국제 표준을 보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녹색의 비상구 표시가 대표적인 예다.

이 도안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비상구 앞 사람의 모습이 정면이었지만,1964년 일본인 디자이너 오타 유키오가 사람의 몸을 사선 방향으로 바꿨다.

오타는 사선 구도가 주는 역동적인 느낌으로 '비상시'의 느낌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세계적인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쌓았다.

또 이를 계기로 일본 디자이너가 유럽과 미주로 대거 진출하는 기회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 국내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서라도 안전 관련 픽토그램에 대한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때 해외에서 외화를 벌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설움을 받았던 것처럼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도 그만큼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안전만큼 중요한 게 있나요? 그림 하나만 봐도 기계를 만질 때 주의할 수 있게 된다면 하나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만큼 픽토그램의 의미가 커지는 것이죠."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