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셨어요.
이번엔 물도 좀 드셔야지요."
광주시 임동성당 건너편 '천주의 성요한 병원'의 치매노인 입원시설인 메니노인센터.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간호사와 자원봉사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입원환자들이 혼자 밥을 먹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봉사자들이 일일이 음식물을 먹여 주거나 옆에서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식사 수발을 하는 봉사자의 대열에 입원환자들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많은 벽안(碧眼)의 노인 둘이 끼어 있다.
아일랜드에서 온 엠마누엘 수사와 정신과 의사인 브라이언 수사다.
올해 여든셋인 엠마누엘 수사는 이 병원을 설립·운영하고 있는 천주의 성요한 수도회의 한국 진출 초기 회원이자 최고령자다.
춘천시립복지원에서 23년간 헌신하다 지난해 11월 광주로 왔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곧장 메니센터로 향한 그는 한 할머니에게 죽 한 그릇을 다 떠먹인 뒤 아직 식사를 마치지 못한 다른 할머니를 도와준다.
식사수발에 걸리는 시간은 대개 30~40분.식사 후에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목욕실로 모셔가 양치까지 도와준다.
70대 할아버지인 브라이언 수사는 침대에 누운 채 거동을 못 하는 할아버지의 식사를 도왔다.
자신도 노인이면서 잠시도 봉사의 손길을 멈추지 않는 이들은 '수도자에게 은퇴란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메니센터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 너무나 밝고 명랑하다는 점.할머니·할아버지들이 힘들게 해도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친자식처럼 옆에 붙어서 재롱을 떤다.
앳된 얼굴의 간호사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메니센터에서 일하는 황 아브라함 수사(39)는 "내 인생에서 지금보다 행복했던 적은 없다"고 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천주의 성요한 수도회가 지향하는 호스피탤러티(Hospitality),환대의 정신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에서 활동했던 이 수도회의 창설자 '천주의 성요한'(1495~1550)은 전 생애에 걸쳐 자비와 환대정신을 실천했다.
그는 아픈 사람을 형제,이웃으로 맞아들여 보살폈고 가난한 이웃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기 위해 헌신했다.
떠돌이,양치기,군인,책장수 등으로 살던 성요한은 1539년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아빌라의 요한' 사제의 강론을 듣고 크게 회개한다.
회개의 강도가 지나쳐 정신병원으로 끌려간 그는 비참한 환자들의 실상을 보고 병들거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1539년 루체나 거리에 최초로 '자선의 집'을 연 그는 매일 거리에서 음식과 물품을 구걸하고 후원자를 구해 '자선의 집' 가족을 먹여 살렸다.
이때 함께 했던 사람들이 수도공동체를 이뤘고 그는 훗날 병자와 간호인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됐다.
"낯선 이,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환영하며 섬기는 것이 우리 수도회의 영성입니다.
거처나 음식,보호,치료가 필요한 사람 등 모든 이가 우리 섬김의 대상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언제나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보살피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천주의 성요한 수도회 한국관구장 장현권 비오 수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래서 이 수도회가 운영하는 병원이나 시설의 모든 관심은 환자와 도움이 필요한 대상자에 맞춰진다.
수도회에 소속된 회원 28명과 각 시설에서 일하는 직원 275명은 오로지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성요한병원은 정신병원과 일반의원으로 구성돼 있는데 여러 가지 명칭부터 일반 병원과는 다르다.
우선 환자를 환자라고 부르지 않고 '손님'이라고 표현한다.
환자라는 이름에 담긴 차별의식을 넘어 손님으로 극진히 모시겠다는 뜻이다.
또 생활회관이라고 부르는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은 안집,개방병동은 샘터,알코올병동은 그라나다센터로 부른다.
용어 하나하나에 환경치료적 요소를 담았다는 얘기다.
정신과 입원환자에게 환자복 대신 평상복을 입게 하고 간호사들도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
가급적 병원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고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서다.
폐쇄병동에도 창살은 없다.
"환자 중심으로 병원을 운영하다보니 힘은 들지요.
안집(폐쇄병동)에서 긴급사태가 벌어질 경우에 대비해 수사 2명이 야간에도 무전기를 휴대한 채 대기해야 해요.
입원실 바로 위인 병원 3층에 수도원을 배치한 것도 '손님'들에게 보다 빨리 달려가기 위해서입니다.
활동의 특성상 수사들은 모두 간호사나 사회복지사,의사 등 전문 자격을 갖추고 있지요."
장 수사도 대학원에서 가족치료를 전공했다.
성요한병원의 내부는 환자들로 북적대는 여느 병원과 달리 널찍하고 한산하다.
사람 수에 비해 너무 많다 싶을 정도의 휴식용 소파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고,환자 대비 간호사 숫자도 많다.
'생활회관'의 경우 99병상에 간호사가 47명이나 된다.
"서비스 수준에 비해 병원비를 싸게 받다 보니 적자가 불가피해요.
영리 목적의 병원이 아니라 많이 받을 수도 없고 수도회가 그렇게 지향하지도 않습니다.
이익이 적다고 다른 병원들이 기피하는 정신과와 27병상의 호스피스센터 등을 운영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지요.
적은 봉급에도 불구하고 함께 일하는 협조자(직원)들이 수도자와 같은 환대의 영성으로 헌신하는 까닭에,그리고 많은 자원봉사자가 도와주는 덕분에 병원과 여타 시설들을 운영할 수 있어요.
사회적 계산으로는 안 맞아도 하느님 계산으로는 맞아떨어지는 것이 바로 섭리거든요."
이 수도회는 성요한병원 외에도 광주요한알코올상담센터,광주공원 노인복지회관,춘천시립복지원,서울 늘푸른나무복지회관,담양대건센터,중국 옌지의 옌벤호스피스병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장 수사는 "우리 병원과 시설,수도원이 존재하는 것은 손님 때문"이라며 "아침·저녁 기도시간에는 성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낮에는 손님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난다"고 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