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때부터 만화를 그리던 소년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연습장에 끄적거린 것들을 모아 한 만화 잡지의 신인 만화가 공모전에 응시했다가 덜컥 대상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데뷔했고 그 작품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은 100만부나 팔렸다.

군 복무를 마친 뒤 1997년부터 판타지 만화 '라그나로크' 연재를 시작했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그에게 게임개발 회사 그라비티로부터 연락이 왔다.

'라그나로크'를 온라인 역할수행게임(MMORPG)으로 만들고 싶다는 제의였다.

만화만큼이나 게임을 좋아했던지라 흔쾌히 승낙했다.

만화 인생에 게임이 들어온 셈이다.

만화가 이명진씨(31).27개국에서 출간된 만화 '라그나로크'의 원작자이자 63개국에 진출한 게임 '라그나로크 온라인' 개발자다.

연수입 2억원을 올리는 이 바닥에서 최상급으로 꼽히는 그이지만 데뷔 시절에 비해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돈이 좀 들어오니까 취미로 모으고 있는 장난감을 마음대로 살 수 있어 좋으네요…(웃음)"

요즈음 그는 가장 많이 수출된 게임이라는 명성에 부합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후속작 '라그나로크 온라인 2'의 막바지 작업에 여념이 없다.

'라그나로크 온라인 2'는 얼마 전 비공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라그나로크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에서 따온 이름으로 '신들의 전쟁' 혹은 '신들의 황혼'이란 뜻이다.

"신화를 모티브로 한 창작입니다.

우리 환경에 맞게 온라인 커뮤니티를 강조한 게임이란 형식으로 재탄생시켰고 세계 시장에서도 먹히는 공룡 알이 된 거죠."

만화 '라그나로크'는 온라인 게임으로 개발되는 동안에도 연재를 계속했다.

이씨는 게이머들의 요구 사항을 만화에 그려 넣었고 만화 독자의 건의 사항을 게임 패치에 추가했다.

플랫폼을 넘나들며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이어갔다.

"화폭이 종이에서 인터넷 세상으로 바뀐 셈이에요. 신천지를 만나니 신이 났어요."

'라그나로크' 게임 1편 개발에 '발만 담갔던' 이씨는 후속작 작업에는 본격적으로 관여해야겠다는 생각에 2003년 말부터 아예 그라비티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출퇴근이 가장 힘들었어요.

원래는 낮에 자고 밤새 만화를 그리는,낮밤이 바뀐 올빼미 생활을 했거든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개발팀에서 가장 먼저 출근해 사무실의 불을 밝히고 제일 늦게 퇴근하며 부지럼을 떠는 사람이 바로 이씨라고 팀원들은 입을 모은다.

'라그나로크 2'팀에서 함께 일하는 최연근 시나리오 라이터는 "유명세를 얻고 성공한 사람 같은 느낌이 전혀 안 들 정도로 겸손하고 너무 열심히 한다"면서 "앞으로 더욱 발전할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캐릭터,그래픽,디자인,원화 작업,스토리 텔링,아이디어 회의 등 '라그나로크 온라인 2'팀의 작업 전반을 총괄한다.

원작자가 직접 게임 제작에 참여하는 걸 그 자신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원작자로서 느끼는 막중한 책임감 덕분에 게임의 완성도가 높아지게 되더군요." 워낙 인기를 얻다 보니 진짜 '라그나로크' 원작자냐는 의심을 많이 샀다.

그럴 때마다 데뷔작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에 중간중간 벽보로 등장하는 '라그나로크'란 이름과 카메오로 나오는 캐릭터를 들춰 보인다.

회사 내에 'DTDS'라는 스튜디오까지 꾸렸다.

'Dive To Dream Sea'라는 뜻으로 '꿈의 바다로 빠지자'는 다소 디즈니 만화 같은 몽환적인 의미다.

사실 DTDS는 이씨가 만화가 시절 문하생들을 가르치며 운영했던 화실 이름이었다.

3년 전 연재를 중단한 만화 '라그나로크',그는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는 걸까.

"언젠가는 만화로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게임 작업에만 몰두할 겁니다.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일이 만화 그리는 것만큼 행복하거든요." 한때 명지대학교 만화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외도도 했지만 역시 사각사각 종이에 그려나갈 때의 느낌은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머리 속은 늘 바쁘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게임 '라그나로크 온라인 3'도 만들어 봐야겠고 또 판타지 풍의 만화 차기작은 구상을 끝내 놨다.

소망이 뭐냐고 물어보니 우리 역사를 재해석해 시공을 초월하는 판타지 만화를 그려 보는 것이란다.

물론 게임으로도 만들고 싶다고.

"저 자신이 멀티미디어 콘텐츠 분야에서 좋은 선례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더욱 많은 후배들이 만화와 게임을 넘나들며 꿈을 펼쳤으면 합니다."

1년에 몇억원씩 벌어들이는 이 젊은이는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해서 행복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