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聖哲 <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

올해는 정부 연구개발 예산이 100억달러(약 10조원)를 돌파하게 된다. 현재 세계에서 정부 연구개발 예산이 100억달러 이상인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중국 캐나다 등 7개국으로 우리나라가 8번째로 연구개발 예산 100억달러를 넘어서게 되는 셈이다. 이들 중 미국 중국과 같은 초대형 국가를 제외하면 대개 국민소득 2만달러를 전후(前後)해 연구개발예산이 100억달러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우리도 새해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돼 그럴 만한 때가 됐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각국의 연구개발예산 100억달러 시점은 사회·경제발전 패러다임의 전환과 이에 적합한 새로운 과학기술정책 기조가 요구되는 시기였다는 점이다. 우리도 중요한 변화의 시점에 와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잠재성장률의 하락,고용 없는 성장기조의 고착화 등 경제발전 패러다임의 변화 없이는 성장의 지속이 어려운 시점에 와 있다. 그러면 우리보다 앞서간 나라들은 어떻게 그러한 상황에서 성공하고 실패했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본은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위기를 거쳐 1985년 플라자 합의에 따른 가파른 엔고(高)를 극복하고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1987년에 정부 연구개발예산 100억달러 시대에 진입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에너지 절약 및 자동화기술개발과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차세대 산업기반기술개발사업 등 산업경쟁력 강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경쟁력은 모방형 혁신모형에 근거한 것으로 1990년대 이후 지식기반경제 패러다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소위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하게 됐다.

전후(戰後) 국유화 등 강력한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을 실행했던 프랑스는 총연구개발투자의 50% 이상을 정부가 부담하고 연구개발의 기획,수행,활용을 국가가 주도하는 임무지향적 정책기조를 채택해 유럽에서 가장 빠른 1987년에 연구개발예산 100억달러를 달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주 해양 등 대형기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경쟁력은 오히려 약화됐다. 과도한 정부개입과 시장규제로 인해 민간의 활력을 효율적으로 국가 발전에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 1980년대까지의 독일은 유럽경제의 성장엔진으로 불렸으며 든든한 제조업과 중소기업이 버팀목 역할을 했다. 1991년 정부 연구개발예산이 100억달러(총연구개발비 규모는 프랑스의 1. 5배)에 달했으나 그후 독일 경제는 통일 후유증과 과도한 사회보장체제,노동시장의 유연성 미흡 등 기술혁신 친화적 제도 구축과 새로운 성장동력의 확보에 실패했다. 특히 정보통신 및 바이오 기술의 열세 등 신기술 분야에서 고전하고 있다.

영국은 1999년에 연구개발예산 100억달러 시대를 맞이했다. 이를 기점으로 영국정부는 영국경제의 발전방향을 '지식기반경제로의 전환'에 둘 것임을 천명했다. 1970~1980년대의 이른바 '잃어버린 20년' 이후 경쟁력이 뒤처진 중공업 등 산업분야를 과감하게 정리하는 대신 금융,문화,디지털,멀티미디어와 같은 고부가가치의 새로운 소프트산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경제구조를 과감하게 전환했다. 연구개발예산 100억달러 이후 영국경제는 고속성장을 하며 유럽의 경제 대국으로 다시금 발돋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선진 각국의 경험으로 보면 연구개발투자가 기술혁신 친화적 사회,경제 패러다임에 잘 부합된 경우 새로운 발전의 전기(轉機)가 됐으나 이들이 서로 유리(遊離)되면 위기에 봉착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지금의 기술혁신체제는 지식기반사회로의 이행에 적절한가. 과학기술이 현실 경제·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있는가. 우리 과학기술은 사회적 약자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해결책을 갖고 있는가. 연구개발예산 100억달러 시대 개막은 과학기술계 내외부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조명돼야 할 것이며 과학기술정책기조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전환점이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