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2일은 삼성전자 사사(社史)에 기록되고도 남을 날이다.

사상 최초로 소니의 시가총액을 앞지른 것.국내 언론들은 일본에서 전자기술을 배워온 삼성전자가 30년 만에 일본을 추월했다고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파이낸셜타임스와 니혼게이자이 등 세계 주요 언론들도 삼성의 약진과 소니의 퇴조를 주요 뉴스로 다뤘다.

그로부터 십여일이 지난 4월19일 저녁 경기도 용인의 삼성인력개발원.검은 에쿠스 승용차들이 '창조관' 앞마당에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전자 계열사 사장단을 불러모은 것이다.

사장들은 처음에 이 회장이 그간의 공로를 치하하면서 자축 파티라도 열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삼성전자가 2002년 1분기 영업이익 2조1000억원으로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독보적인 실적을 거둔 직후였다.

하지만 회의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이 회장의 표정은 굳었고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5년,10년 뒤에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 땀이 난다…항공기가 마하의 속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전체 소재를 바꿔야 하듯이 (삼성도) 이제 전체 사고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선발에 치이고 후발에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이 회장의 질타와 지시는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오전 8시에 또 다시 회의가 시작됐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모 사장은 "오후 6시쯤 회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며 "'식은 땀이 난다'는 회장님의 엄중한 얘기는 충격적이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회장은 웬만해서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엄격한 회의 스타일에 부하들을 칭찬하는 데도 인색한 편이다.

지금까지 삼성 내부에서 '위기의식'이라는 단어가 가장 강조됐던 해는 사상 최고의 경영실적을 냈던 2004년이었다.

삼성그룹은 그해 무려 20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냈지만 이 회장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지금이 가장 큰 위기상황"이라고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이 회장은 스스로도 비관적인 경영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언젠가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면서 "기업가란 항상 비관적이다.

모든 것을 비관적 바탕 위에 놓고 긍정적 결과를 바라는 게 기업"이라고 기업관(觀)을 밝힌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의 마음 속에는 긍정과 낙관이 자리잡을 틈이 없다.

하지만 걱정과 비관 속에서 출발한 경영이 끝내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이유는 이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실행 능력 때문이다.

이 회장이 그룹 회장 취임 후 삼성에 가장 실망한 점은 지시사항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잘못됐는지 도중에 '회장 지시사항'이 사라지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이 회장은 비서팀에 자신의 발언을 녹음할 것을 지시하고 관련자들에게 반드시 들려주도록 했다.

이를 통해 자신이 느끼는 위기감을 조직과 임직원들에게 즉각 전파하고 공유하도록 했다.

철저한 '톱다운' 방식의 소통이었지만 '신경영'의 본질이 이 회장을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회장이 스스로에게 위기의식을 강조하는 방식 또한 처절하다.

삼성의 실패가 국가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라는 점에 몸서리를 치는 스타일이다.

몇 년 전 신년 인사회에서 나온 이 회장의 발언.

"우리는 지난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를 매국노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우리 자신이야말로 김완용,박완용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제2의 이완용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객해봐야 한다."

특별취재팀 = 조일훈·이태명·유창재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