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의 모습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을 하나 꼽으라면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잠시 지난 몇 개월을 돌이켜 볼까요? 작년 12월부터 숨 가쁘게 진행된 계엄, 탄핵, 그로 인한 극렬한 대치부터 늘 있었던 빈부격차, 부동산, 입시, 육아 같은 일상적 문제까지. 네, 한국의 동시대를 단적으로 담아낸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아트 칼럼에서 갑자기 왜 시사 얘기냐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컬렉션을 할 때, 특히 현대 미술작품이라면 ‘시대성’을 반영한 작품을 찾으라고 많은 전문들이 조언합니다. 그저 잘 그린 작품이 아니라요. 시대정신을 담지 못한다면 과거의 답습에 불과하고, 이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남준이 그토록 중요한 미술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도, 전후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급부상하게 된 것도 모두 이런 급격한 사회변화, 이를 관통하는 시대정신과 연관이 있습니다.자 그럼 이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볼까요? 컬렉터들을 선도하는 컬렉터로 꼽히는 ‘루벨’이 흥미로운 전시를 합니다. 동시대 미국의 단면을 포착한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아메리칸 비네트’展을 개최합니다. (비네트는 이야기책이나 짧은 글에 포함되는 삽화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컬렉터가 바라본 미국이라는 나라가 되겠습니다.루벨 컬렉션이란?루벨 컬렉션은 돈 루벨(Don Rubell)과 메라 루벨(Mera Rubell) 부부가 1965년 시작했습니다. 의대생과 교사였던 이들은 미술을 좋아했지만 비싼 그림을 턱턱 사기엔 그저 젊은 부부였을 뿐입니다. 작가 스튜디오에 들러 할부로 작품을 구매했을 정도로 아끼고 아껴 작품을 모았습니다. 이들 부부 컬렉션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
2025년, 충청남도가 방문의 해를 선포하며 패기 넘치는 새해의 문을 활짝 열었다. 충남의 관광 활성화는 김태흠 충남도지사의 오랜 염원이었다. 김 도지사는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충남을 위해 한 길을 걸어왔다. 충남에 대한 자부심도 그만큼 강하다. 한류의 원조이자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기호 유학과 선불교가 태동한 ‘문화와 철학, 예술의 도시’ 충남이 이제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다시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 김 도지사의 각오다.충남은 15개 시군이 모여있다. 예로부터 비옥한 땅으로 산과 들, 바다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두루 갖춘 것으로 유명한 충남은 보령과 태안 일대 서해안을 배경으로 섬과 바다, 갯벌의 휴양 시설은 물론 부여와 공주 일대 백제문화유산, 아산의 온천과 천안의 도심 속 낭만, 서산의 맛과 예산의 전통문화까지. 모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서해안에서 휴양을 즐길 수 있고, 해양자원을 통해 건강과 뷰티를 동시에 챙길 수 있는 최고의 ‘해양레저 관광도시’가 바로 충남입니다. 충남에는 숨겨진 보석 같은 곳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께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찾아오는 분들이 많지 않은 상황입니다.”김 도지사는 당선 이후 ‘힘쎈 충남’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산업적 측면에서는 성과도 많았다. 이번에는 힘쎄 관광 충남을 향해 전진 중이다. 충남이 전 국민의 관심과 호감 속에 꼭 오고 싶은 지역이 되고 이를 통해 관광 산업의 미래 먹거리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저는 충남이 ‘대한민국 관광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지역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1998년 북한에서 근대 화가 총람인 「조선력대미술가편람」을 출간할 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저자 리재현에게 "동무, 지난 시기 창작 공로가 있는 이쾌대 등 미술가들도 놓치지 말고 소개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월북화가 이쾌대가 북한에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이에 따라 펀람에는 <박연 초상>,<송아지> 등 이쾌대의 월북 후 작품 4점이 수록되었다.그러면 남한에서도 잊힌 존재 이쾌대가 1998년까지 북한에서도 인정을 못 받았단 말인가? 그는 6·25전쟁 당시 월북하여 활동하다가 1959년 김일성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반종파투쟁'의 와중에서 정적들에게 밀려, 친형 이여성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북한에서 위장병을 앓았다는 것을 보면, 숙청으로 맘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병으로 고생하다가 1965년 위 천공으로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남한에서 잊혔던 그의 이름이 불린 것은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 월북 예술인들을 전격 해금하면서부터였다. 1991년 이쾌대의 작품이 공개된 이후, 우리 미술계에서는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의 작품은 스케일에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압도한다. 이쾌대가 활동했던 1940년대 2미터가 넘는 그림을 그린 화가는 없었다. '역사화'라는 미술 장르는 서양 미술사에서나 거론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민족의 역동적인 모습을 캔버스에 구현하는 화가가 있었는가. 1913년생인 이쾌대(1913~1965)와 비슷한 연배인 김환기(1913년생), 이중섭(1916년생), 박수근(1914년생) 등과 동급으로 국민화가의 반열에 놓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35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이쾌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