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아식 제조회사 제품에서 사카자키균이 검출됐습니다."

지난해 9월7일 한 방송사의 저녁 뉴스를 듣는 순간 홍보맨 경력 20년째인 성장경 남양유업 상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홍보맨의 육감으로 창사 이래 가장 큰 위기가 닥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로 부터 근 두 달 뒤인 10월31일.식품의약품안전청은 방송 뉴스와 비슷한 내용을 발표했다.

"인체에 해로울 수 있으나 끓여먹으면 괜찮다"는 내용을 추가해서.그러나 사태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첫 보도가 나가기 전 50%였던 조제분유시장 점유율이 11월 초엔 43%대로 7%포인트나 하락하기도 했다.

성 상무의 육감이 현실로 나타난 것.'무차입 경영'의 원조 남양유업이 이름모를 세균 때문에 큰 상처를 입고 병이 생기는 게 아닌가.

업계는 남양이 어떤 타개책을 내놓을지에 주목했다.

새해 벽두인 지난 8일 남양유업은 '승부수'를 내놨다.

조제분유 무균화 생산시스템을 구축하고 사카자키균을 '제로(0)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경쟁사들을 놀라게 한 것.소리 소문없이 준비해 온 승부수는 '품질 개선'이라는 녹슬지 않는 경영원칙을 대내외에 다시 알리는 정면돌파 작전이었다.

품질 개선과 생산성 향상으로 이익을 많이 내고,그 돈을 차곡차곡 쌓아 품질 개선과 생산성 향상에 다시 쏟아붓는 '남양식 경영'은 이 회사가 자부하는 경쟁 업체들과의 차별화 포인트다.

이 회사의 사내유보금은 1997년 800억원대에서 지금은 5000억원대로 불어나 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다

사카자키균 파동에 대처한 과정은 남양유업의 기업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게 업계 평가다.

사카자키균은 발생 빈도가 낮지만 신생아와 유아에게 수막염·패혈증·발작 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유업계는 지난해 10월 국내 유아식에서 사카자키균이 검출됐다는 식약청 발표 이후 소비자들의 불안감으로 크게 위축됐다.

남양유업은 공장 안으로 유입되는 공기 중의 세균까지 걸러질 수 있도록 7중 공기필터 100여개를 설치하고,모든 생산 공정에 멸균 및 소독 시스템을 강화해 유해균을 완전 차단했다.

이런 시설을 갖추는데 100억원이 눈깜짝할 사이 들어갔다.

소비자들에겐 "앞으로 사카자키균과 관련해 문제가 발생할 경우 환불 조치하고 피해를 보상해주는 소비자 무한 보증제를 실시하겠다"고 공표했다.

박건호 대표는 이번 파동 이후 '비 온 뒤 땅이 굳어진' 효과를 냈다고 말했다.

이젠 공장을 출입하려면 화장을 지워야 하고,귀고리나 반지 등 액세서리도 착용할 수 없다.

또 손톱 매니큐어도 칠할 수 없고,열이나 기침나는 직원은 출입이 통제되도록 규정을 강화했다.

박 대표는 "식품업체는 소비자의 신뢰가 최고의 자산"이라며 "회사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정면돌파 하기로 결정했다"강조했다.

싸늘했던 소비자들은 분유시장 점유율을 49%대로 끌어올려주면서 남양유업의 이런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줄임말이라는 얘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사업재편 속도 낸다

분유 때문에 골치를 썩였지만 분유는 더이상 남양유업의 주력 사업분야가 아니다.

1990년대까진 분유가 이 회사 매출의 40% 이상을 차지했지만 지금은 17% 선으로 떨어진 대신 우유(35%),발효유(24%),음료(24%) 등이 안정된 매출 포트폴리오를 구성,종합식품회사의 면모를 다져가고 있다.

남양유업은 1990년대 후반부터 출산 감소에 따른 분유시장 축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꾸준히 품목 다각화를 추진해 왔다.

1990년대 100개 미만이던 생산 품목이 지금은 300여개로 늘었다.

특히 '몸이 가벼워지는 시간 17차(茶)' 등 잇달아 히트상품을 내면서 음료분야가 '블루오션'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음료분야에서 1500여억원의 매출을 올린데 이어 올해는 2000억원을 목표하고 있다.

1999년 '니어워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출시한 음료제품만 50여종.음료 선발기업들이 주춤할 때 파죽지세로 제품을 개발,출시한 것이 음료 '빅5'진입을 목전에 두게 된 비결이다.

스테디 셀러가 많은 것도 남양유업의 자랑거리다.

유엔 산하 FAO(세계식량농업기구)가 직접 격려를 보낼 만큼 주목을 받았던 천연 DHA우유 '아인슈타인',기능성을 대폭 강화한 우유 '뼈건강연구소 206','맛있는 우유GT','이오' 등이 대표적이다.

한 번 히트상품 리스트에 오르면 이를 스테디 셀러로 만들기 위해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인다.

올해는 '17차'에 승부를 걸 계획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품종생산체제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부담이 만만치 않다는 게 과제다.

박 대표는 "좋은 제품은 공급량이 많지 않아도 시장에서 제값을 받을 수 있고,일단 스테디 셀러가 되면 지속적인 원가절감 노력을 통해 마진을 높여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 200ml짜리 우유 한 팩의 원가를 평균 10원씩 낮췄는데,하루 3700만원씩 이윤이 더 남게 됐다고 박 대표는 소개했다.

해외 비즈니스로 저성장 탈출

남양유업은 롯데칠성음료,롯데제과와 함께 주식시장에서 '식음료 트로이카'로 불린다.

지난 연말 장중 한때 100만원 고지를 밟기도 했으나 지난 17일 종가는 78만2000원으로 주춤한 상태다.

사카자키균이라는 단기 악재에다 출산율 감소와 내수경기 위축 등 대외변수들이 남양유업 주가 상승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대외변수들이 쉽게 해소되기 힘든 만큼 위기 상황임에는 분명하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급변하는 시장환경은 우리 회사만 겪는 일이 아니다"며 "무차입 경영을 하는 업계 1위기업이란 장점을 살리면 저성장시대에서도 종합식품회사로 우뚝 솟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5000억원대의 내부 유보금을 활용해 공격적으로 연구개발(R&D)과 마케팅에 나서면 경쟁사들이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투자와 회수,재투자로 이어지는 '사업 프로세스'의 선순환 구조를 갖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설명이다.

박 대표는 "남양유업의 장기적인 비전은 네슬레나 다농과 같은 세계적인 종합식품회사가 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대만,중국,베트남,싱가포르,중동지역 시장을 적극적으로 뚫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무리수는 절대 두지 않을 것이며,고유 브랜드로만 수출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남양식 경영'이 글로벌 시장에서도 빛을 볼 수 있을지 주목된다.

남궁 덕 기자 nkdu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