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레임 덕(lame duck) 신세는 피할 수 없다. 대통령만이 아니다. 국회의원이든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든 다음 임기에 도전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임기 말에 예외없이 절룩거리는 오리처럼 힘이 빠지게 마련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나 국회의 동의를 받기 어려워 보이는 4년 연임제 개헌을 밀어붙이는 것은 레임 덕에 구애받지 않는 용기일 수도 있고,현실을 무시한 오기일 수도 있다. 4년 연임제가 책임정치 구현이나 선거비용 절감을 위해 도입해봄직하지만 지고지선은 아니라는 게 헌법학자들의 견해다. 5년 단임제에서도 책임정치가 가능하고 국정에 대한 중간 평가를 하듯 임기 중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는 것이 괜찮다는 주장도 많다. 개헌이 이처럼 양면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국민 생각과 정치 지형을 감안해 추진해야 한다.

현재로선 반대가 많다. 국회 통과도 어려워 보인다. 계속 밀어붙이다간 국론분열과 정치혼란만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노 대통령의 개헌의지를 용기가 아닌 오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 오기는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임기 말에 친인척 비리가 터져나오지 않아 스스로 떳떳한 데다 집권 여당에 그의 권력을 이어받을 확실한 대선 주자가 없어 국가의 백년대계나 대의를 앞세우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한다.

고집스런 마이웨이형 지도자로 불리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도 노 대통령처럼 임기 말이다. 두 사람은 시차는 있지만 23일 같은 날 신년 대국민 연설을 한다.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에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내용들이 많았다. 힘이 펄펄 넘치던 2002년 1월29일의 연설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이란 북한을 싸잡아 '악의 축'으로 불렀다. 이라크 공격의 발판을 깔았고 대북제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악의 축 연설은 주유엔 대사를 지냈던 존 볼튼의 '악의 축을 넘어'라는 연설,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연설로 이어지면서 미국의 대외전략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에 부시 대통령이 할 연설의 길이나 내용이 축소될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임기가 1년여밖에 남지 않았고 야당인 민주당에 의회의 주도권을 뺏긴 후 하는 연설이기 때문이다. 이라크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사고 있는 이란 문제를 짚고 넘어가겠지만 야당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이민법 개정,에너지 자립,재정적자 감축 같은 국내 이슈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알려졌다. 현실 타협적인 축소지향형 연설을 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레임 덕에 들어간 대통령은 국정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되 자신을 둘러싼 세력관계와 상황에 맞는 효과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요즘 리더십의 상황이론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노 대통령의 남은 임기 1년은 그리 짧은 기간이 아니다. 23일 신년특별연설을 시작으로 새해 국정 포부를 밝히는 자리가 이어질 것 같다. 대의명분도 좋고 장기비전도 좋지만 제발 시끄럽게 하지 않으면서 국민들의 배가 부를 수 있도록 경제활력을 높이는 데 올인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으면 한다.

고광철 국제부장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