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기행] (23) 부천 꼰솔라따선교수도회‥ 서로 종이 되기를 자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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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저희 수도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경기도 부천시 역곡2동의 꼰솔라따선교수도회 역곡 본원.역곡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의 주택가에 자리잡은 수도원에 들어서자 사람 좋게 생긴 강 디에고 신부(55)가 유창한 한국말로 반갑게 맞아준다.
다세대 및 원룸형 주택들 사이에 빨간 벽돌로 3층 건물을 세운 수도원은 겉모습만으로는 주변 건물들과 다르지 않다.
덕분에 그냥 수도원을 지나쳐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왔다.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외방선교를 지향하는 우리 수도회는 그동안 유럽과 아프리카,남미에서만 활동했지요.
그러다 1987년 수도회 총회에서 아시아에 진출키로 결정하고 방글라데시와 인도네시아,한국 등 3개국을 사전답사했는데 한국은 그때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 너무나 달랐어요.
불교와 유교 등 한국의 유서 깊은 종교적 전통은 우리가 전혀 모르던 것이었지요.
이런 종교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선택한 것입니다."
스페인 출신의 오유진 신부가 내온 에스프레소 커피를 앞에 놓고 수도원의 1층 식당에서 디에고 신부는 이렇게 설명했다.
1988년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할 때 스페인 브라질 콜롬비아 출신의 신부 3명과 함께 온 디에고 신부는 이탈리아 출신이다.
각각 국적이 다른 선교사 넷이서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며 낯선 땅에서의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신학당에 살면서 연세어학당을 다녔고 이듬해부터 역곡에 전셋집을 얻어 생활했다.
이들이 선택한 선교활동의 방향은 도시 빈민을 돕는 일과 새로운 수도자를 양성하는 성소(聖召) 개발,그리고 종교 간 대화다.
"우리의 첫 활동지역은 지금은 재개발된 인천 만석동 달동네였어요.
1992년 선교사 2명이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생활을 함께했지요.
어린아이들은 같이 놀아주고 노인들께는 말동무가 돼줬죠.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봉사단체가 하던 공부방도 도와주고,마음이 아픈 사람에겐 위로가 되는 얘기도 들려주고…."
이들은 선교사이면서도 비기독교인에게 "하느님,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냥 동네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도와주며 삶을 나눌 뿐이다.
만석동에서 6년간 살면서 이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디에고 신부는 "활동의 결과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조금씩 더 착하게 살도록 했다면 내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라며 하나의 사례를 들려준다.
한 신문에 만석동 관련 기사가 실려서 읽어 보니 그 동네에 살던 어떤 주부가 "우리 집 근처에 외국인 신부 둘이 왔는데 아이들과 놀아주고 모두 즐겁게 사는 것을 보면서 나도 더 착하게 살겠다고 결심했다"면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 연탄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 오지 않아도,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아도 관계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하철 안이나 역,길거리에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삶을 나누면서 자신의 태도와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생활 자체가 선교입니다."
꼰솔라따선교회는 1997년 만석동을 떠난 뒤에도 역곡 본원을 중심으로 빈민 돕기를 계속했고,서울 양재동의 비닐하우스촌인 구룡마을에서도 지난해까지 6년간 공부방 등을 운영하며 나눔의 손길을 폈다.
지금은 의정부 교구에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 중이며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일도 벌이고 있다. 오는 7월에는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케냐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지원자를 모으고 있다.
"꼰솔라따는 이탈리아어인데 '위로자이신 성모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의 보호자가 '꼰솔라따 성모 마리아'인데 우리 수도회의 창설자인 복자 요셉 알라마노는 토리노 근교 농촌에서 태어나 만인의 위로자이신 성모님으로부터 새로운 희망과 힘을 얻곤 하셨지요.
현 시대는 불의한 상황이 너무나 많아서 그만큼 많은 위로가 필요하니까요."
꼰솔라따수도회가 특별한 관심을 갖는 또하나의 분야는 종교 간 대화다.
한국 진출 직후부터 타종교와의 대화에 나서 타종교에 대해 공부도 하고 1999년에는 종교 간 대화를 위한 영성의 집인 '위로의 샘터'를 역곡 교외의 조용한 마을인 소사구 옥길동에 세웠다.
디에고 신부의 차를 타고 아담한 집 두 채로 돼 있는 '위로의 샘터'에 들르자 개신교 단체의 여성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위로의 샘터'에선 매달 세 차례씩 종교 간 대화모임이 열리고 타종교인에게 공간을 빌려주기도 한다.
서울 구로동 원각사와는 이미 여러 차례 교류모임을 가졌고,'위로의 샘터' 바로 앞에 있는 보광사와도 친한 사이다.
디에고 신부가 보광사에 들어서자 신자들이 "어머,신부님!"하면서 합장한다.
디에고 신부는 "현재 한국의 종교 간 대화는 지도자들만 만나기 때문에 너무 공식적"이라며 "밑바닥 신자들과 더 자주 만나야 한다"고 해법을 제시한다.
'위로의 샘터'에서 수도원으로 돌아오니 점심시간.식당에 모인 사람들은 다국적이다.
디에고 신부와 오유진 신부,케냐 출신의 피터 신부,포르투갈 출신의 베드로 신부.차려진 음식도 퓨전이다.
밥과 국,반찬은 기본이고 빈대떡 위에 토마토와 계란프라이를 얹은 요리까지 나왔다.
현재 한국에 와 있는 선교사(신부)는 모두 10명.수도자들은 평생 외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국적은 별 의미가 없다.
수도원 정문에서 배웅하던 디에고 신부가 이렇게 인사한다.
"차오!" 이탈리아어로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뜻이란다.
서로가 종이 되기를 자처한다면 '위로'가 필요한 세상은 좀 더 따뜻하지 않을까.
부천=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저희 수도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경기도 부천시 역곡2동의 꼰솔라따선교수도회 역곡 본원.역곡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의 주택가에 자리잡은 수도원에 들어서자 사람 좋게 생긴 강 디에고 신부(55)가 유창한 한국말로 반갑게 맞아준다.
다세대 및 원룸형 주택들 사이에 빨간 벽돌로 3층 건물을 세운 수도원은 겉모습만으로는 주변 건물들과 다르지 않다.
덕분에 그냥 수도원을 지나쳐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왔다.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외방선교를 지향하는 우리 수도회는 그동안 유럽과 아프리카,남미에서만 활동했지요.
그러다 1987년 수도회 총회에서 아시아에 진출키로 결정하고 방글라데시와 인도네시아,한국 등 3개국을 사전답사했는데 한국은 그때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 너무나 달랐어요.
불교와 유교 등 한국의 유서 깊은 종교적 전통은 우리가 전혀 모르던 것이었지요.
이런 종교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선택한 것입니다."
스페인 출신의 오유진 신부가 내온 에스프레소 커피를 앞에 놓고 수도원의 1층 식당에서 디에고 신부는 이렇게 설명했다.
1988년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할 때 스페인 브라질 콜롬비아 출신의 신부 3명과 함께 온 디에고 신부는 이탈리아 출신이다.
각각 국적이 다른 선교사 넷이서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며 낯선 땅에서의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신학당에 살면서 연세어학당을 다녔고 이듬해부터 역곡에 전셋집을 얻어 생활했다.
이들이 선택한 선교활동의 방향은 도시 빈민을 돕는 일과 새로운 수도자를 양성하는 성소(聖召) 개발,그리고 종교 간 대화다.
"우리의 첫 활동지역은 지금은 재개발된 인천 만석동 달동네였어요.
1992년 선교사 2명이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생활을 함께했지요.
어린아이들은 같이 놀아주고 노인들께는 말동무가 돼줬죠.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봉사단체가 하던 공부방도 도와주고,마음이 아픈 사람에겐 위로가 되는 얘기도 들려주고…."
이들은 선교사이면서도 비기독교인에게 "하느님,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냥 동네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도와주며 삶을 나눌 뿐이다.
만석동에서 6년간 살면서 이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디에고 신부는 "활동의 결과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조금씩 더 착하게 살도록 했다면 내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라며 하나의 사례를 들려준다.
한 신문에 만석동 관련 기사가 실려서 읽어 보니 그 동네에 살던 어떤 주부가 "우리 집 근처에 외국인 신부 둘이 왔는데 아이들과 놀아주고 모두 즐겁게 사는 것을 보면서 나도 더 착하게 살겠다고 결심했다"면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 연탄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 오지 않아도,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아도 관계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하철 안이나 역,길거리에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삶을 나누면서 자신의 태도와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생활 자체가 선교입니다."
꼰솔라따선교회는 1997년 만석동을 떠난 뒤에도 역곡 본원을 중심으로 빈민 돕기를 계속했고,서울 양재동의 비닐하우스촌인 구룡마을에서도 지난해까지 6년간 공부방 등을 운영하며 나눔의 손길을 폈다.
지금은 의정부 교구에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 중이며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일도 벌이고 있다. 오는 7월에는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케냐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지원자를 모으고 있다.
"꼰솔라따는 이탈리아어인데 '위로자이신 성모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의 보호자가 '꼰솔라따 성모 마리아'인데 우리 수도회의 창설자인 복자 요셉 알라마노는 토리노 근교 농촌에서 태어나 만인의 위로자이신 성모님으로부터 새로운 희망과 힘을 얻곤 하셨지요.
현 시대는 불의한 상황이 너무나 많아서 그만큼 많은 위로가 필요하니까요."
꼰솔라따수도회가 특별한 관심을 갖는 또하나의 분야는 종교 간 대화다.
한국 진출 직후부터 타종교와의 대화에 나서 타종교에 대해 공부도 하고 1999년에는 종교 간 대화를 위한 영성의 집인 '위로의 샘터'를 역곡 교외의 조용한 마을인 소사구 옥길동에 세웠다.
디에고 신부의 차를 타고 아담한 집 두 채로 돼 있는 '위로의 샘터'에 들르자 개신교 단체의 여성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위로의 샘터'에선 매달 세 차례씩 종교 간 대화모임이 열리고 타종교인에게 공간을 빌려주기도 한다.
서울 구로동 원각사와는 이미 여러 차례 교류모임을 가졌고,'위로의 샘터' 바로 앞에 있는 보광사와도 친한 사이다.
디에고 신부가 보광사에 들어서자 신자들이 "어머,신부님!"하면서 합장한다.
디에고 신부는 "현재 한국의 종교 간 대화는 지도자들만 만나기 때문에 너무 공식적"이라며 "밑바닥 신자들과 더 자주 만나야 한다"고 해법을 제시한다.
'위로의 샘터'에서 수도원으로 돌아오니 점심시간.식당에 모인 사람들은 다국적이다.
디에고 신부와 오유진 신부,케냐 출신의 피터 신부,포르투갈 출신의 베드로 신부.차려진 음식도 퓨전이다.
밥과 국,반찬은 기본이고 빈대떡 위에 토마토와 계란프라이를 얹은 요리까지 나왔다.
현재 한국에 와 있는 선교사(신부)는 모두 10명.수도자들은 평생 외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국적은 별 의미가 없다.
수도원 정문에서 배웅하던 디에고 신부가 이렇게 인사한다.
"차오!" 이탈리아어로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뜻이란다.
서로가 종이 되기를 자처한다면 '위로'가 필요한 세상은 좀 더 따뜻하지 않을까.
부천=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