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품은 쓰지도 버리지도 못해 책상 한구석에서 먼지에 쌓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늘 손길과 눈길이 닿아야 그 의미가 바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부분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한편에 처박혀 있다가 '쓰레기'가 돼 종말을 맞곤 한다.

그게 기념품의 일반적인 운명이라면 디자인회사 누브티스(nouveautes)의 이경순 대표(45)는 기념품을 잊혀지지 않는 사건 및 인물과 '동격'으로 만드는 예술가다.

그는 기념품이 사건과 인물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아 영원히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고객을 위한 '맞춤 기념품'을 디자인한다.

기념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한다고 할까.

이 대표는 1990년대 말 유명인의 넥타이를 맞춤 디자인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황영기 우리금융 회장과 김쌍수 LG전자 부회장의 넥타이를 맞춤 디자인했다.

황 회장은 삼성증권 사장 시절 주가 상승을 의미하는 화살표가 그려진 넥타이를,김쌍수 LG전자 부회장은 휴대폰 모양이 새겨진 넥타이를 맸다.

최근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의전용으로 쓸 기념품을 만들어 줘 주가를 올렸다.

이 대표는 유엔 깃발에 새겨진 월계수 잎과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그려진 푸른색 스카프를 직접 만든 것.

그는 "뜻깊게 전달받은 기념품이 어느 순간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지 않으려면 주문자의 취향과 기대치를 충분히 반영한 '맞춤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의 디자인회사 '누브티스'란 새롭다는 뜻의 불어인 'nouveau'와 섬유를 뜻하는 영어인 'textile'에서 따왔다.

"머그컵 디자인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 500만원이 들어가지만 제가 디자인한 제품은 골칫덩이가 되지 않고 오래 간직할 수 있습니다." 취지는 좋지만 문제는 비용이다.

굳이 비싼 돈을 들여 맞춤 기념품을 제작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기획 단계에서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만 어느 정도 대량생산 물량이 되면 머그컵의 가격은 2만~3만원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답이 나왔다.

이 대표는 원래 미국에서 '잘나가는' 디자이너였다.

홍익대 미대 공예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로체스터공대 미술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스토니프린트'라는 미국 원단회사에 컬러리스트로 입사했다.

회사에서 착실하게 내공을 쌓아 페라가모,에르메스 등 명품 업체의 넥타이 원단을 디자인하는 일을 담당했다.

한창 회사에서 주가를 올릴 즈음 부모님의 '콜'을 받아 1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1994년 귀국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디자이너로서 '제2인생'을 꾸려나가는 게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당시엔 원단 디자인을 돈 주고 산다는 인식이 없었어요. 원단 박람회나 잡지에 나온 견본을 베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죠."

미국에서 명품만 만들던 디자이너가 한국에서는 문전박대 당하는 처지에까지 이르렀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지를 놓고 여러 날 고민했다.

그는 고민 끝에 결국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이 대표의 부친은 생활비를 대줄테니 하고 싶은 일을 계속 밀어붙이라고 조언했다는 것.그는 부친의 조언대로 디자인 작업에 몰두,일부 기업(고객)을 대상으로 디자인 샘플을 발송하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투자'라는 개념에 눈을 떴습니다. 아버지는 서른이 넘은 딸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한 셈이고,저는 제 디자인을 무상으로 기업들에 제공하며 '리스크'를 감수한 것이지요."

그렇게 4~5개월이 지나자 업체 한 두 군데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의 독창적인 디자인이 회사의 고급이미지와 코드가 맞는다고 생각한 회사들이 주문을 내기 시작한 것.처음 얻은 일감은 침구류와 옷 등에 쓰일 원단 디자인이었다.

이렇게 국내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이 대표가 '기념품 디자이너'로 업계에 소문난 것은 1994년 말께 이수성 당시 국무총리에게 의전용 넥타이를 납품하면서부터다.

그 소식이 입소문을 타고 유명인들이 디자인을 요청해왔다.

이 대표는 기념품 디자인이 어려운 것은 의뢰인과 의뢰인의 선물을 받을 사람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이중부담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이번에 제작한 유엔 기념품은 반 사무총장의 취향과 그 선물을 받을 세계 각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함께 고려해 제작했다고."마음 같아서는 통일을 기원하는 뜻에 한반도를 기념품마다 그려넣고 싶었지요.

그렇지만 유엔은 한국이 아닌 전 세계를 위한 조직이어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와 월계수를 그려넣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디자인한 것 가운데 대우조선이 선박을 주문한 그리스 선주들에게 제공한 기념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자신이 생각하는 맞춤 디자인의 덕목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다.

보통 조선회사들은 회사의 역사가 담긴 '백서'를 선물로 주지만 그는 역발상으로 스카프를 선물로 택했다.

스카프 안에 손글씨로 쓴 대우조선의 역사뿐 아니라 선박그림까지 모두 담았다.

물론 그리스 선주가 크게 만족했다는 후문.

"이제는 제품의 품질보다 디자인에서 경쟁력이 드러나는 시대지요.

맞춤 기념품도 회사나 특정인의 이미지를 여러 사람에게 오랫동안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분야가 될 것입니다."

글=박신영·사진=김영우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