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뉴욕 맨해튼에 있는 뉴욕시청 브리핑 룸.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과 뉴욕주 출신의 찰스 슈머 상원의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들은 매킨지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근거로 "앞으로 10년 안에 월가가 세계 금융의 중심지 역할을 빼앗길지 모른다"며 "샤베인스-옥슬리 법을 개정하는 등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자리에서 눈길을 모은 인물은 엘리어트 스피처 뉴욕 주지사. 그는 예상을 깨고 블룸버그 시장 및 슈머 의원과 나란히 단상에 올랐다. "월가를 보호하기 위한 보고서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피처 지사의 '전력'을 잘 아는 기자들이 "진심이냐"고 몇 번이나 물어봐야 했다.

스피처 지사는 뉴욕주 검찰총장 출신이다. 작년 11월 중간 선거에서 당선돼 올 1월 취임했다. 검찰총장 당시 그는 '월가의 저승 사자'로 유명했다. 검찰총장 3년 동안 월가 금융회사를 기소해 받아 낸 벌금만 해도 37억달러에 달했다. "스피처 온다"고 하면 월가의 아이조차 울음을 그친다는 농이 나올 정도였다.

그의 손에 의해 '영원한 보험인' 모리스 그린버그 전 AIG 회장이 옷을 벗었다.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도 주식 내부 거래로 쇠고랑을 찼다. 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조차 조사 대상이 됐다. 참다 못한 JP모건체이스와 웰스파고 등 대형 은행 11개 및 재무부 산하 통화감독청(OCC)이 소송을 내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미 자본시장위원회가 "미 금융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된 건 이중 삼중의 규제 때문"이라며 첫 번째 요인으로 스피처를 꼽을 만큼 그는 월가 '공공의 적'이었다.

이런 이력을 가진 스피처가 월가의 각종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러다 보니 '정치가 뭐기에'라는 냉소가 나온다. 뉴욕주 총 수익의 9.2%를 창출하는 곳이 월가임을 감안하면 주지사로선 당연한 변신이란 평가도 나온다.

자리에 따라 생각을 자주 바꾸는 건 물론 좋지 않다. 그러나 자리를 무시한 채 과거의 생각만 답습하는 것도 곤란하다. 대통령은 대통령답게,시·도지사는 시·도지사답게,국회의원은 국회의원답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걸 '저승 사자' 스피처가 보여주고 있다면 그의 변신에 너무 후한 점수를 주는 걸까.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