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첫째, 둘째, 셋째도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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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선 < 노동전문기자 >
1886년 미국노동총연맹(AFL)을 창설한 새뮤얼 곰퍼스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불세출의 노조지도자이다.
담배공장 노동자였던 그는 사회주의 사상이 유럽과 미국을 휩쓸고 있을 무렵, 36세의 나이로 AFL 초대위원장을 맡아 새로운 노동운동을 실험했다.
계급투쟁과 정치파업만이 노동운동의 전부인 양 인식되던 시절,경제적 조합주의를 들고 나온 것이다.
강경파들의 반발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본질이고 그것이 일선 노동자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운동의 방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첫째도 빵,둘째도 빵,셋째도 빵"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조합원들에게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대우받자'는 노사협조주의를 끊임없이 전파했다.
정직과 신뢰를 생활신조로 삼으며 자기관리를 철저히 한 탓에 오랜 세월 노조위원장을 지내면서도 비리사건에 한번도 연루된 적이 없었다.
그는 사망(1924년)할 때까지 38년 동안 단 한 차례(1894년 )만 빼고 위원장에 당선되는 위력을 과시했다.
실리를 내세운 그의 운동철학은 현장에 먹혀들어가기 시작해 AFL은 곧바로 미국의 간판 노동단체로 성장했다.
그 전까지 투쟁과 이념을 기치로 내걸고 미국 노동운동을 이끌던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과 전국노동조합(National Labor Union)은 하루아침에 주변세력으로 전락했다.
곰퍼스의 실리주의가 노조원들을 사로잡은 데는 당시 일어났던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1886년 5월1일)도 영향을 미쳤다.
노조집회에서 폭발물이 터져 여러 명의 경찰과 노동자들이 사망하자 투쟁노선을 걷던 노동기사단 등의 지도부가 와해되고 대신 실리주의를 내건 AFL이 급부상한 것이다.
곰퍼스는 AFL을 숙련공 중심의 직종별 노동자들로 구성했다.
숙련공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미숙련공까지 끌어안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귀족노조'란 비난이 없지 않았지만 통합의 리더십으로 좌파세력들까지 한데 묶는 데 성공했다.
당시 AFL 조직내에는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마르크스 보이'들이 득실거렸다.
마르크스가 노예해방을 부르짖은 링컨 대통령과 편지로 우정을 나누었던 때와 그리 멀지않은 시대였던 만큼 사회주의는 생소한 이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투쟁과 거리를 두었다.
파이를 키워야 노조원들에게 돌아가는 분배의 몫도 커진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곰퍼스는 자서전에서 "어떤 때는 자본가에게 배신을 당해 투쟁심이 솟구쳤지만 참았다"고 고백했다.
섣부른 투쟁은 오히려 잃는 게 많다고 여겼다.
툭하면 시비부터 거는 한국의 노동운동가들이 새겨들을 만한 대목이다.
온건파인 이석행 신임 민주노총위원장이 엊그제 취임했다.
민주노총은 좌파 강경세력의 투쟁노선에 밀려 길거리 투쟁을 일삼고 있고 국민들로부터는 '왕따'를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의 가장 시급한 과제도 내부조직을 통합하고 국민들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정착시키는 일이다.
경제를 걱정하는 많은 국민과 노동자들은 이 위원장에게 '한국의 곰퍼스'가 되어주길 진정 바라고 있다.
upyks@hankyung.com
1886년 미국노동총연맹(AFL)을 창설한 새뮤얼 곰퍼스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불세출의 노조지도자이다.
담배공장 노동자였던 그는 사회주의 사상이 유럽과 미국을 휩쓸고 있을 무렵, 36세의 나이로 AFL 초대위원장을 맡아 새로운 노동운동을 실험했다.
계급투쟁과 정치파업만이 노동운동의 전부인 양 인식되던 시절,경제적 조합주의를 들고 나온 것이다.
강경파들의 반발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본질이고 그것이 일선 노동자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운동의 방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첫째도 빵,둘째도 빵,셋째도 빵"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조합원들에게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대우받자'는 노사협조주의를 끊임없이 전파했다.
정직과 신뢰를 생활신조로 삼으며 자기관리를 철저히 한 탓에 오랜 세월 노조위원장을 지내면서도 비리사건에 한번도 연루된 적이 없었다.
그는 사망(1924년)할 때까지 38년 동안 단 한 차례(1894년 )만 빼고 위원장에 당선되는 위력을 과시했다.
실리를 내세운 그의 운동철학은 현장에 먹혀들어가기 시작해 AFL은 곧바로 미국의 간판 노동단체로 성장했다.
그 전까지 투쟁과 이념을 기치로 내걸고 미국 노동운동을 이끌던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과 전국노동조합(National Labor Union)은 하루아침에 주변세력으로 전락했다.
곰퍼스의 실리주의가 노조원들을 사로잡은 데는 당시 일어났던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1886년 5월1일)도 영향을 미쳤다.
노조집회에서 폭발물이 터져 여러 명의 경찰과 노동자들이 사망하자 투쟁노선을 걷던 노동기사단 등의 지도부가 와해되고 대신 실리주의를 내건 AFL이 급부상한 것이다.
곰퍼스는 AFL을 숙련공 중심의 직종별 노동자들로 구성했다.
숙련공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미숙련공까지 끌어안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귀족노조'란 비난이 없지 않았지만 통합의 리더십으로 좌파세력들까지 한데 묶는 데 성공했다.
당시 AFL 조직내에는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마르크스 보이'들이 득실거렸다.
마르크스가 노예해방을 부르짖은 링컨 대통령과 편지로 우정을 나누었던 때와 그리 멀지않은 시대였던 만큼 사회주의는 생소한 이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투쟁과 거리를 두었다.
파이를 키워야 노조원들에게 돌아가는 분배의 몫도 커진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곰퍼스는 자서전에서 "어떤 때는 자본가에게 배신을 당해 투쟁심이 솟구쳤지만 참았다"고 고백했다.
섣부른 투쟁은 오히려 잃는 게 많다고 여겼다.
툭하면 시비부터 거는 한국의 노동운동가들이 새겨들을 만한 대목이다.
온건파인 이석행 신임 민주노총위원장이 엊그제 취임했다.
민주노총은 좌파 강경세력의 투쟁노선에 밀려 길거리 투쟁을 일삼고 있고 국민들로부터는 '왕따'를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의 가장 시급한 과제도 내부조직을 통합하고 국민들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정착시키는 일이다.
경제를 걱정하는 많은 국민과 노동자들은 이 위원장에게 '한국의 곰퍼스'가 되어주길 진정 바라고 있다.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