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1970년대 긴급 조치 위반자에게 유죄를 선고한 판사들의 명단을 공개하자 일선 판사들의 반발이 있었다.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든가,당시 실정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판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운 나쁘게 공안사건을 맡은 게 죄"라고도 했다.

이에 대해 어떤 진보단체는 "해당 판사들이 양심이 있다면 더 이상 변명 없이 과거 청산과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촉구한 반면 다른 보수단체에서는 "악법(惡法)에 따른 판결보다 악법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만큼,해당 판사들의 명단까지 공개한 것은 '마녀사냥'이라고 반박했다.

또 다른 과거사 문제,즉 일제(日帝) 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당시 지식인 혹은 고위 관리를 지낸 인사들의 명단을 과거사위원회가 공개한 데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혹자는 과거는 운명이다,과거청산이란 말에는 과거를 현재 시점에서 진실로 파악할 수 있다는 '오만'이 깔려 있다,과거 청산의 대상이 되는 직업군이 주로 생각이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지식인이나 판사들에게 치중된다는 것은 '불균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모두가 독립투사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유신독재'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면서 어쩔 수 없는 현실적 한계에 갈등을 겪었던 법관도 많았을 것이다.

이들을 한꺼번에 싸잡아 '왜 그때 양심에 따라 저항하지 못했느냐'고 매도하는 것은 지나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점이 있다.

소위 과거 청산의 대상이 된 지식인들이나 판사들은 바로 국가의 근본 가치가 폭력에 짓밟힐 때,양심을 지키고 정의(正義)를 세워야 할 직분을 가진 특별한 사람들이다.

총칼을 들고 싸우진 않더라도,각자의 자리에서 양심을 지키고 양심에 따라 판단할 것을 기대하며 선택된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국민들은 그들에게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시대를 이끄는 사회 지도층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판단의 잣대는 위법 여부가 아니라 '양심'과 '정의' '용기' 같은 것들이다.

당연히 보통사람들보다 더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거사 문제에 대해 '과거는 운명'이었으니 현재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라고 변명하는 것은 당당하지 못하다.

과거사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싹싹하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때 이 사회에 진정한 '권위'가 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