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세상사는 이야기] (9)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 ‥ 40여년 최씨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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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부 회장의 '최씨 고집'은 제약업계에 소문이 자자하다.
박카스의 '드링크 시장 41년 1위 신화'를 무너뜨린 '비타500' 탄생 배경에도 그의 최씨 고집이 자리하고 있다.
최 회장은 비타500 개발 당시 회사 연구팀에 첫맛과 끝맛,목넘김과 마시고 난 후의 잔존감까지 완벽한 제품을 주문했다.
시제품들이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자 무려 50번이나 퇴짜를 놨다.
최씨 고집은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혀를 사로잡았다.
2001년 첫선을 보인 비타500은 4년 만인 2005년 매출 1000억원대의 슈퍼 히트 상품으로 성장했다.
그의 고집은 갖가지 '무용담'을 낳았다.
1985년께 정부 모 기관장과의 '백주대낮 결투'가 그 예다.
당시 권력 실세였던 그 기관장은 관세청에 "광동제약이 자사 편자환에 중국 인삼을 넣어 외화를 낭비하고 있다"며 광동제약의 중국 인삼 수입을 금지시키라고 압력을 넣었다.
관세청이 그의 말에 따라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자 최씨 고집에 발동이 걸렸다.
최 회장은 즉시 기관장의 사무실로 찾아가 얼굴을 맞대고 항의했다.
몇 차례 고성이 오간 끝에 둘은 멱살을 붙잡으며 주먹질 직전 상황까지 치달았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회사가 공중분해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중국 인삼도 그대로 수입됐습니다.
만약 보복 조치가 내려지면 저도 신문사에 억울한 사연을 폭로하려고 했었죠."
그의 고집이 성공 가도만을 달린 것은 아니다.
지난 IMF사태 당시 1차 부도를 촉발시킨 계기가 됐던 조선무약과의 '쌍화탕 전쟁'은 최씨 고집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1975년 이후 줄곧 광동제약이 1위를 달려온 쌍화탕 시장에 조선무약이 85년 신제품을 내놓은 것이 발단이었다.
이에 최 회장은 자사 제품의 가격을 내리는 전략으로 맞섰다.
조선무약 역시 가격을 내리면서 맞불작전을 펼쳤다.
양측은 나중에는 제품원가보다도 낮은 가격에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한 달 손실액만 7억~8억원에 이르는 말 그대로 '출혈경쟁'이 이어졌다.
이러한 싸움은 97년까지 12년간 계속됐다.
결국 IMF 사태가 터지면서 조선무약이 먼저 부도를 맞았고 광동제약도 98년 1차 부도를 맞으면서 양측의 경쟁은 끝났다.
그의 최씨 고집은 여전하다.
올해로 73세를 맞이했지만 회사 업무에 손을 놓을 기미가 안 보인다.
박카스의 '드링크 시장 41년 1위 신화'를 무너뜨린 '비타500' 탄생 배경에도 그의 최씨 고집이 자리하고 있다.
최 회장은 비타500 개발 당시 회사 연구팀에 첫맛과 끝맛,목넘김과 마시고 난 후의 잔존감까지 완벽한 제품을 주문했다.
시제품들이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자 무려 50번이나 퇴짜를 놨다.
최씨 고집은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혀를 사로잡았다.
2001년 첫선을 보인 비타500은 4년 만인 2005년 매출 1000억원대의 슈퍼 히트 상품으로 성장했다.
그의 고집은 갖가지 '무용담'을 낳았다.
1985년께 정부 모 기관장과의 '백주대낮 결투'가 그 예다.
당시 권력 실세였던 그 기관장은 관세청에 "광동제약이 자사 편자환에 중국 인삼을 넣어 외화를 낭비하고 있다"며 광동제약의 중국 인삼 수입을 금지시키라고 압력을 넣었다.
관세청이 그의 말에 따라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자 최씨 고집에 발동이 걸렸다.
최 회장은 즉시 기관장의 사무실로 찾아가 얼굴을 맞대고 항의했다.
몇 차례 고성이 오간 끝에 둘은 멱살을 붙잡으며 주먹질 직전 상황까지 치달았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회사가 공중분해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중국 인삼도 그대로 수입됐습니다.
만약 보복 조치가 내려지면 저도 신문사에 억울한 사연을 폭로하려고 했었죠."
그의 고집이 성공 가도만을 달린 것은 아니다.
지난 IMF사태 당시 1차 부도를 촉발시킨 계기가 됐던 조선무약과의 '쌍화탕 전쟁'은 최씨 고집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1975년 이후 줄곧 광동제약이 1위를 달려온 쌍화탕 시장에 조선무약이 85년 신제품을 내놓은 것이 발단이었다.
이에 최 회장은 자사 제품의 가격을 내리는 전략으로 맞섰다.
조선무약 역시 가격을 내리면서 맞불작전을 펼쳤다.
양측은 나중에는 제품원가보다도 낮은 가격에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한 달 손실액만 7억~8억원에 이르는 말 그대로 '출혈경쟁'이 이어졌다.
이러한 싸움은 97년까지 12년간 계속됐다.
결국 IMF 사태가 터지면서 조선무약이 먼저 부도를 맞았고 광동제약도 98년 1차 부도를 맞으면서 양측의 경쟁은 끝났다.
그의 최씨 고집은 여전하다.
올해로 73세를 맞이했지만 회사 업무에 손을 놓을 기미가 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