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의 변두리 동네에서 자라 다른 곳으로 이사한 사람들이 간혹 옛동네 근처에 가면 깜짝 놀란다.

이유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서,다른 하나는 몇십년 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서다.

강북 재개발이 한창이니 달라지겠지만 그동안엔 전자보다 후자 쪽이 많았다.

세월이 멈춰버린 듯한 곳은 신기하게도 도심 바로 옆이다.

왕십리(往十里)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서울의 동쪽 끝인 잠실과 80년대에야 동네 꼴을 갖춘 강남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동안 시청·광화문에서 10분 거리인 왕십리는 대로변에 목공소와 철공소 즐비한 사반세기 전 상태로 남아 있었다.

왕십리는 문자 그대로 '십리를 간다'는 뜻.태조의 명을 받아 조선의 도읍지를 찾던 무학대사가 지금의 왕십리 일대인 동쪽 들판에서 지세를 살피던 중 밭 갈던 노인으로부터 "여기서 헤매지 말고 서쪽으로 십리만 더 가라"는 얘기를 듣고 북한산 자락을 천거한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조선 개국과 함께 생겨난 유서 깊은 지명인 셈이다.

오래 된 동네,고단한 이들이 모여들어 얼기설기 살았던 곳이어서 변화가 힘들었던 걸까.

유명 대학이 있고,국철과 지하철 등 3개 노선이 만나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임에도 불구하고 김소월의 시 '왕십리'와 김흥국의 가요 '59년 왕십리'에 보이는 낡고 허름한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왕십리가 조만간 확 달라지리라는 소식이다.

오는 9월 왕십리역에 10개 상영관이 들어서는 민자역사가 완공되는 것을 계기로 이 일대가 문화의 거리로 바뀐다는 것이다.

야외무대를 갖춘 '젊음의 광장'도 생기고 간판 또한 깔끔하게 정리되리라 한다.

왕십리 로터리에서 성동구청과 한양대 등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따라 실개천이 만들어지고 가로수도 보기 좋은 것으로 대체된다고 한다.

조심해서 걸어야 하는 곳,피해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닌 '걷고 싶고 가보고 싶은 곳'으로 만든다는 얘기다.

산뜻한 문화의 거리 왕십리는 생각만 해도 반갑다.

단 누추함 속 정겨움만은 사라지지 않기를.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