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 백화점에서 선물을 단체 구매하던 대기업까지 대형 마트(할인점)로 구매선을 돌리면서 유통업체들 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서울 시내 주요 백화점과 대형 마트가 기업들을 상대로 설 선물 단체 주문을 받아본 결과,과일 한우 등 10만원이 넘어가는 고가 선물을 주로 취급하는 백화점은 대부분 문의만 많을 뿐 실구매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반면 3만~4만원대 중·저가 선물이 많은 대형마트는 기존 중소기업,자영업자 고객에 대기업의 주문까지 옮겨오면서 매출이 급증하고 있다.

◆VIP 대상 선물도 할인점에서

본사에 별도로 기업 특판팀을 가동하고 있는 삼성테스코 홈플러스는 이달 들어 본격화된 올해 기업 대상 설 선물 특판 매출이 지난해보다 35% 늘었다.

곽성권 홈플러스 홍보실 과장은 "특판 신장률이 일반 매장 선물 세트 판매 신장률에 비해 다섯 배 가까이 높다"며 "일부 대기업과 금융사가 긴축에 나서면서 VIP 대상 선물까지도 할인점에서 조달하고 있는 게 주된 요인"이라고 풀이했다.

이렇다보니 설 연휴를 일주일 앞둔 9일까지 백화점들의 특판 매출은 지난해 설에 비해 각각 5~6%씩 빠졌다.

20만~30만원대 한우를 단체로 구매하는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VIP에 건네지는 선물도 대부분 7만~8만원대 와인으로 종류가 바뀐 탓이다.

백화점 대신 대형 마트로 구매선을 바꾼 기업들은 많아도 새로 거래를 트는 기업은 전무해 특판팀 관계자들은 한숨만 쉬고 있다.

롯데백화점 법인영업팀 관계자는 "고정 거래처를 제외하고는 대기업,금융권,외국계 회사 등에서 새로 유입되는 VIP 대상 선물 세트 단체 주문이 거의 없다"며 "10만원이 넘는 고가 선물세트는 가격 문의는 많아도 판매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중·저가 와인 백화점 매출 '버팀목'

설 대목 매출에 타격을 입은 백화점들은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한 백화점은 이번 주를 매출 손실분을 메울 마지막 기회로 보고 단 10개만 주문해도 특판팀 직원들이 거래처를 방문해 출장 접수를 받아주고 있다.

또 다른 백화점은 법인 고객에게도 마일리지를 적립해주기로 결정했다.

특판은 같은 선물세트라도 일반 판매보다 5~10% 가격이 싸게 책정되기 때문에 마일리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해왔다.

백화점에서 그나마 잘 팔리는 것은 와인 선물 세트다.

현대백화점의 법인 영업을 대행하는 현대H&S의 이영근 운영팀장은 "와인 선물 세트가 지난해 대비 20%가량 신장한 것을 제외하고는 판매가 늘어난 품목이 별로 없다"고 전했다.

올해는 각각 종류가 다른 중·저가 와인 두 병과 따개 등을 묶음으로 구성한 7만~8만원대 선물세트가 인기다.

이 같은 와인 세트는 한우,과일,한과 등 고급 선물 세트의 절반 값이지만 받는 이가 느끼는 선물의 '격'은 비슷하다는 게 판매 급증의 이유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몬테스 알파처럼 가격대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칠레 와인보다 이름 모를 중·저가 프랑스 와인이 더 생색이 나는 경우가 많아 설 대목에는 훨씬 인기 있다"고 귀띔했다.

◆마른 걸레도 한번 더 짠다

백화점의 법인 대상 특판영업이 이처럼 썰렁해진 반면 대형 마트는 신바람이 났다.

이마트 마케팅실 관계자는 "지금까지 법인 상대 특판에서 주력은 1만~2만원대 선물세트였는데 올해는 3만~4만원대 제품이 잘 팔리면서 서울 지역 점포는 특판 매출이 평균 40% 신장했다"며 "주문 기업 입장에선 7만~8만원짜리 백화점 선물을 절반으로 줄이면서 어쩔 수 없이 건너온 것이지만 우리로선 판매 단가가 배로 뛴 셈"이라고 말했다.

마른 걸레도 또 한 번 쥐어 짜는 기업들의 노력은 선물용 상품권 단체구매 때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10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을 발행사나 판매 대행 은행 등에서 정가로 구입하지 않고,서울 명동 일대의 상품권 장외 거래소를 통해 대량 구매하는 기업이 늘었다.

단 5%에 불과한 할인율에 이끌려 발품을 아끼지 않고 거래소까지 찾아오고 있는 것.

상품권 장외거래업체 '씨티원'의 박영자 사장은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기업들 덕분에 상품권 거래량이 지난해보다 50%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