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좀 쉬어 가라고

꽃그늘에 앉아 가쁜 숨 주저앉히고

지나는 바람한테 객적은 농담이라도 건네 보라고 흰 머리카락 돋는다

툭툭 털기만 했던 묵은 속내도 한번 헤집어 보라고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곳은

눈 밝은 너에게 보아 달라고

슬쩍 내밀어 보라고

흰 머리카락 돋는다

눈 어두워지기 전에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빛바랜 추억을 들고

이름을 물어물어

기억의 강을 거슬러오를 사람은 없다

새 옷 한 벌을 옷장 안에 걸어놓고

잠 못 들었던 밤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지나간 날들의 일기를 애써 지우다가 혼자 웃는다 (…)-박홍점 '여백' 부분

늙어 간다는 게 자랑일 수는 없지만 겁먹을 일도 아니다. 피해갈 수도 없다. 화관처럼,흰 머리카락들이 머리 위에 얹히면 빛바랜 추억을 주섬주섬 주워담아야 할 시간이다. 계획보다는 체념이 많아진다. 기쁨과 슬픔의 진폭도 줄어든다. 큰 설레임도 없다. 대신 고요와 평온이 온다. 그토록 어깃장을 놓던 삶에게 객쩍은 농담을 건넬 수도 있다. 미안해 하지 않으며 낮잠을 자도 된다. 평일 한낮 눈치보지 않고 어디든 어슬렁거릴 수 있다. 마침내 삶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여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