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어서 더 고운 … 손끝에 남는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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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굿공이 사뿐사뿐 드놓는 연약한 팔/약방아 찧던 월궁 솜씨 여기서도 그대로고!/깁적삼 들릴 때마다 드러나는 저 흰 살결!'(절구질하는 아가씨)
우리말의 고운 자태를 이토록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약방아를 찧던 월궁(月宮) 선녀가 내려온 듯,절굿공이를 쳐들 때마다 짧은 비단적삼이 약간씩 치들리며 살포시 드러나는 겨드랑 밑의 흰 살결을 조선의 문신 유영길(1538~1601년)은 이렇게 노래했다.
하지만 원래 그의 시는 '춘저녀(春杵女)'라는 칠언절구 한시였다.
한자의 '옷'을 입은 채 먼지 덮힌 고서로 전해오던 시를 이렇게 우리말로 살려낸 이는 우리 나이로 올해 아흔인 한학자 손종섭 선생.'손끝에 남은 향기'(마음산책)는 그가 옛시 280수를 결 고운 우리말 시조가락으로 다듬어 한시 원문과 해설을 곁들인 책이다.
정치인 관료 야인 천민 기녀까지 다양한 계층이 노래한 사랑과 이별,그리움과 회한,해학과 풍류 등이 고루 담겼다.
표제로 쓰인 '손끝에 남은 향기'는 이제현의 고려가사인데,한역시(濟危寶歌·제위보가)로만 전하는 것을 현대어로 되살렸다.
'수양버들 시냇가에 비단 빨래 하노라니/흰 말 탄 선비님이 손잡으며 정을 주네./손끝에 남은 향기야 차마 어이 씻으리?'
다듬이질 소리만 듣고 이웃 걱정을 하던 옛 인심도 생생하다.
'무슨 일 밤새도록 도드락 도드락/팔목이 시도록 못 쉬는 이웃 소리/저 소리 내 집관 달라 마음 한결 쓰이어라.'(정학연,이웃집 다듬이소리)
같은 다듬이소리라도 평온한 호흡의 '도도락 도도락(陶陶樂)'에는 '즐거워라! 즐거워라!'는 뜻이 담겨있고,출정한 남편의 겨울옷을 다듬는 애달픈 심사의 '도도락 도도락(搗搗落)'은 '어쩔거나! 어쩔거나!'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432쪽,1만2000원.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