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읽어버린 집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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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시인 >
집이란 무엇인가. 집이란 단순한 물리적 거처일 뿐인가. 아니다. 본래 집이란 인간 영혼이 숨쉬는 아늑한 휴식 공간이다. 또한 그곳은 생의 흔적과 숨결이 밴 아우라의 처소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거처하고 있는 집은 어떠한가. 환금성(換金性)의 가치로 전락하고 말지 않았는가. 열린 시공간으로서의 만남의 집이 아니라 유폐와 단절과 고립이라는 감옥의 처소에서 나날의 구차한 일상을 연명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이 돼버린 지 오래 됐다. 또한 집은 사회적 신분을 결정짓는 표지가 돼버렸다. 그리하여 물리적 처소만이 아니라 마음의 안식처로서의 집을 우리는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자기 이름이 등재된 집을 소유하고는 있으나 생(生)의 실질적인 차원에서 부랑인의 신세를 면치 못한,마음 속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민박생활자인지도 모른다. 마음의 거처를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살이가 날로 각박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마음의 집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거리에서 거리로 수많은 방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모텔방 비디오방 게임방 노래방 타임방 휴게방 소주방 대화방 전화방 찜질방 수면방 머리방 등등 거리로 쏟아져 나온 방의 숫자는 상식과 상상의 수위를 넘고 있다. 왜 집 속에 들어있어야 할 방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가. 집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강은교 시 '자전 2'중) 때문에 방들이 참지 못하고 집 바깥으로 뛰쳐나오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가옥은 열린 공간의 순기능보다는 닫혀 있는 역기능이 더 우세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사각의 방 속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그 순간 그 방은 유폐와 단절과 고립으로서의 섬이 된다. 각자의 섬 속에 들어앉아 타자(他者)와의 교신과 소통을 위해 이메일과 휴대폰이라는 전자기술 매체에 의존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 임시방편일 뿐,근원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가족 구성원 간에도 대화가 부재하고 소통이 불가능해지니 내면이 황폐화돼 절대적 고독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유년 시절 통과의례적으로 경험하곤 했던 고아공포증을 성인이 돼 다시 앓는 개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거리에서 거리로 쏘다니며 시끄러운 내면을 달랠 방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다.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어찌해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근대 이전의 가옥은 비록 물리적 차원에서 보면 단순 소박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지만,또 가난이 떠나지 않아 매사 불편하고 어려웠지만 구석구석 은근한 정과 숨결이 배 있어 얼마나 안온하고 정겨웠던가.
하지만 우리는 이제 새와 달빛과 구름이 드나들던 집을 잃어버렸다. "흙과 나무,세월이 맞물려 지어진 집"(길상호 시 '그 노인이 지은 집' 중) 대신 시멘트 범벅의 사각의 틀 속에 갇혀 전자기계 따위에나 의존하면서 가까스로 실존의 고독을 견디며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의 수인(囚人)이 돼 사는 동안 생각도 정서도 모가 나고 각이 져가고 있다.
집 속의 방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룸(room)이 아닌 방(bang)을 찾는다. 그곳에서 그들은 안식을 찾고 위로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과연 거리의 방들이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것은 더운 여름날 습관처럼 마시게 되는 탄산음료가 그렇듯이 임시방편일 뿐이다. 아니 마시고 난 뒤면 더 큰 갈증이 찾아오듯이 더 큰 결핍을 낳을 뿐이다. 거리에 방이 많은 사회는 불행하다. 방은 은밀하고 불온하고 부도덕하고 파렴치하다. 방은 우리의 영혼을 파먹고 갉아먹는다. 방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누구라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치명적 질병을 앓아야 한다. 거리의 방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거리의 방들이 폐업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집의 방들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내일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이다. 탯줄을 묻은 집에 모여앉아 갓 끓여낸 떡국처럼 따끈하고 구수한 정(情)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퍼주고 오시기 바란다.
집이란 무엇인가. 집이란 단순한 물리적 거처일 뿐인가. 아니다. 본래 집이란 인간 영혼이 숨쉬는 아늑한 휴식 공간이다. 또한 그곳은 생의 흔적과 숨결이 밴 아우라의 처소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거처하고 있는 집은 어떠한가. 환금성(換金性)의 가치로 전락하고 말지 않았는가. 열린 시공간으로서의 만남의 집이 아니라 유폐와 단절과 고립이라는 감옥의 처소에서 나날의 구차한 일상을 연명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이 돼버린 지 오래 됐다. 또한 집은 사회적 신분을 결정짓는 표지가 돼버렸다. 그리하여 물리적 처소만이 아니라 마음의 안식처로서의 집을 우리는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자기 이름이 등재된 집을 소유하고는 있으나 생(生)의 실질적인 차원에서 부랑인의 신세를 면치 못한,마음 속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민박생활자인지도 모른다. 마음의 거처를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살이가 날로 각박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마음의 집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거리에서 거리로 수많은 방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모텔방 비디오방 게임방 노래방 타임방 휴게방 소주방 대화방 전화방 찜질방 수면방 머리방 등등 거리로 쏟아져 나온 방의 숫자는 상식과 상상의 수위를 넘고 있다. 왜 집 속에 들어있어야 할 방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가. 집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강은교 시 '자전 2'중) 때문에 방들이 참지 못하고 집 바깥으로 뛰쳐나오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가옥은 열린 공간의 순기능보다는 닫혀 있는 역기능이 더 우세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사각의 방 속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그 순간 그 방은 유폐와 단절과 고립으로서의 섬이 된다. 각자의 섬 속에 들어앉아 타자(他者)와의 교신과 소통을 위해 이메일과 휴대폰이라는 전자기술 매체에 의존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 임시방편일 뿐,근원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가족 구성원 간에도 대화가 부재하고 소통이 불가능해지니 내면이 황폐화돼 절대적 고독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유년 시절 통과의례적으로 경험하곤 했던 고아공포증을 성인이 돼 다시 앓는 개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거리에서 거리로 쏘다니며 시끄러운 내면을 달랠 방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다.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어찌해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근대 이전의 가옥은 비록 물리적 차원에서 보면 단순 소박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지만,또 가난이 떠나지 않아 매사 불편하고 어려웠지만 구석구석 은근한 정과 숨결이 배 있어 얼마나 안온하고 정겨웠던가.
하지만 우리는 이제 새와 달빛과 구름이 드나들던 집을 잃어버렸다. "흙과 나무,세월이 맞물려 지어진 집"(길상호 시 '그 노인이 지은 집' 중) 대신 시멘트 범벅의 사각의 틀 속에 갇혀 전자기계 따위에나 의존하면서 가까스로 실존의 고독을 견디며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의 수인(囚人)이 돼 사는 동안 생각도 정서도 모가 나고 각이 져가고 있다.
집 속의 방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룸(room)이 아닌 방(bang)을 찾는다. 그곳에서 그들은 안식을 찾고 위로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과연 거리의 방들이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것은 더운 여름날 습관처럼 마시게 되는 탄산음료가 그렇듯이 임시방편일 뿐이다. 아니 마시고 난 뒤면 더 큰 갈증이 찾아오듯이 더 큰 결핍을 낳을 뿐이다. 거리에 방이 많은 사회는 불행하다. 방은 은밀하고 불온하고 부도덕하고 파렴치하다. 방은 우리의 영혼을 파먹고 갉아먹는다. 방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누구라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치명적 질병을 앓아야 한다. 거리의 방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거리의 방들이 폐업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집의 방들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내일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이다. 탯줄을 묻은 집에 모여앉아 갓 끓여낸 떡국처럼 따끈하고 구수한 정(情)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퍼주고 오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