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은 여러 가지로 빌 클린턴 시절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닮았다. 두 사람 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회장을 지냈다. 젊은 시절 행정부에서 일한 경험도 공유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루빈과 폴슨 외에도 존 코자인 전 회장을 뉴저지 주지사로 진출시켰다. 머지않아 대통령도 배출할지 모르겠다. 미국을 금정(金政) 복합체라고 말한다면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엔 공화·민주의 차이가 없다. 시장에서 커온 사람들이 행정부를 장악한다는 점에서 전·현직 관료들이 시장을 지배하는 한국과는 판이하다. 이들은 국제금융이라면 시쳇말로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

폴슨 장관은 지난 2월 초 "엔 약세는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을 반영한 것이어서 문제없다"고 말해 의원들을 놀라게 했다. 의회는 다음날 무역,에너지,금융서비스 위원장 이름으로 엔 강세를 요구하는 공동결의문을 작성해 행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폴슨의 엔 약세 용인 발언은 독일 에센에서 열린 G7 재무장관 회담에서도 되풀이됐다. 1995년 루빈 장관이 달러당 80엔까지 떨어졌던 엔 환율을 140엔까지 되돌려 놓을 때와 결코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당시엔 달러 강세에 강조점이 있었다면 지금은 엔 약세다. 그러나 이 방점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볼 수는 없다.

"무려 1조달러의 무역적자 때문에 달러는 조만간 괴멸 지경에 처할 것"이라고 주장해왔던 '언제나 반미'주의자들에게는 실망스런 일도 되겠다. 유럽 언론들은 주요 유럽국들의 무역 흑자가 줄어드는 추세를 도표까지 그려가면서 경쟁 통화인 '엔 타도!'를 외치고 있지만 바로 그 무역흑자라는 마력 때문에 역설적으로 아직은 미국의 발언권이 유지되고 있다. 세계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국제수지표의 반대편에 미국만 적자를 써넣고 있다. 동네 가게에서조차 물건을 팔아주는 사람이 어깨에 힘을 주는 법이다. 물건을 팔아야 흑자가 나는 것이고 그것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 유럽과 일본과 중국과 그리고 한국의 어쩔 수 없는 무역구조다.

달러 강세냐 엔 약세냐는 방점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역시 국제 질서의 변화다. 급부상하는 중국의 대항마로 일본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미국 측 전략이 엔 약세를 용인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87년 일본 금융 관행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던 'BIS 비율'이라는 것이 만들어진 이후 거품 붕괴와 10년 불황의 쓰디쓴 잔을 벌컥벌컥 마셔댔던 일본이었다. BIS 비율은 자기자본을 계산할 때 위험자산인 주식과 대출을 제외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일본 은행들이 황급히 대출을 회수하고 보유 주식도 팔아 치웠던 것은 그 결과다. 10년 장기 불황은 그렇게 막을 올렸다.

수출로 쌓았던 국부(國富)를 하루아침에 절반으로 삭감하며 들이닥쳤던 이 '숫자의 괴물'을 만들어낸 사람은 그린스펀의 전임자였던 폴 볼커 FRB 의장이었다. 체이스 은행 부행장을 지냈고 록펠러 장학생으로 불렸던 사람이며 미 재무부 금융국장과 국제담당 차관을 지냈다. 금정복합 체제는 볼커 이전에도 그랬고 볼커를 거쳐 지금의 폴슨 장관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볼커는 80년대 초 미국 금리를 가공할 수준인 20%까지 끌어올리면서 미국 전부를 구조조정했다. 거품이 잔뜩 끼어있는 일본 경제를 삭감하는 정도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평화가 단지 전쟁의 없음은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은 로망 롤랑이다. 그는 평화를 일컬어 "영혼의 치열한 전쟁"이라고도 했다.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는 참여정부의 노선은 불행히도 환율 정책에까지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태평양의 관리자를 자처하는 미국으로서는 더더욱 일본과 엔 약세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일본에 허용하는 바로 그 만큼의 손실은 한국과 중국,유럽에서 보충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스스로 선을 긋고 걸어나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벌써 자동차 등 한국 수출 전선의 일각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냉전 아닌 열전(熱戰)이 터지고,붉은 피를 흘리고서야 서울은 또 호들갑을 떨 모양이니 이를 두고 무뇌증이라고 해야 하나 영혼이 없다고 해야 하나. 더구나 97년에 호된 경험을 하고도 그러니….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