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鄭泰憲 고려대 교수·한국사 >

3ㆍ1운동은 두 달 이상 한반도 전역은 물론 해외에서 치열하게 전개됐고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지속됐다. '남한대토벌 작전'이나 만주에서처럼 '삼광(三光) 작전'으로 불린 초토화 작전을 자행했던 일제는 이 때에도 민간인에게 광란의 학살을 가했다.

사망자만 7500여명에 이르렀고,한반도 주민 대부분이 친척이나 친구들 가운데 사망자나 다친 사람, 구속되거나 검거된 사람이 있을 만큼 말 그대로 거족적 운동이었다. 되찾아야 할 나라의 정체(政體)도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일 만큼 조선인의 의식도 크게 변화했다. 신민(臣民) 의식을 탈피해 반일투쟁 속에서 민주적ㆍ민족적 의식이 확산되어 간 것이다. 생명과 맞바꿔야 했던 구호 '대한독립 만세'는 나라의 주권과 구성원의 인권을 송두리째 앗아간 식민통치에 대한 조선인들의 답이자 결론이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한 늙은 죄수는 50년 만에 출소했지만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모든 세계였던 감옥이 오히려 편하고 자유스럽다는 노예의식이 정상적 삶을 꾸릴 능력과 의지를 앗아간 것이다. 3ㆍ1운동 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은 더욱 치열해져 갔지만, 다른 한편 이 '쇼생크 효과'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이를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부류가 생겨나기도 했다.

식민통치는 민주주의를 경험할 겨를도,민주적 지도자를 양성할 조건도 앗아갔다. 열등감과 체념이 반복 주입됐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기의 문화ㆍ역사에 대한 정체성 회복은 심각한 과제였다. 따라서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다고 나라의 내용과 구성이 일거(一擧)에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나라를 찾아야 구성원의 힘으로 나라의 내용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민주적ㆍ민족적 의식이 확산(擴散)되는 일대 계기였던 3ㆍ1운동은 지속성이나 규모 면에서 4ㆍ19 민주항쟁, 1987년 민주화 투쟁의 전사(前史)가 된다. 경제성장이 되면 자연히 민주주의가 이뤄진다는 천박한 속류 유물론을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전후 독립국 가운데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특히 힘든 여정을 밟은 민주화 운동과 많은 불협화음 속에서도 제도화돼 가는 민주주의야말로 한국이 다른 나라와 크게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받는 가운데 생산력 발휘의 조건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시대의 생산성은 그러한 시대의 수준에 제약되면서 구성원들이 헤쳐나간 결과이고 오늘의 생산성은 박정희 시대와 조응(調應)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철없는 한국 학자들 중에는 겉모습만 수입한 앙상한 근대주의에 매몰돼 일제 지배가 경제성장의 기반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물론 20세기 전반기까지의 제국주의 식민사학의 복사판이다. 그러나 국가의 정책과 힘을 전제로 해서 자본주의와 시장을 논하는 게 '상식'이다. 이와 달리 일제시기에 대해서도 오로지 자본가, 경제성장 언술만 반복하는 일부 경제학자들의 '상식'에서는 경제외적 폭력에 의존한 일제의 강제동원도 자본주의적 고통으로 치부한다.

한국사의 정체성(停滯性)을 주장하면서 발전의 내적 동인과 국가회복운동인 민족운동을 부정한다. 이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교과서까지 새로 만들자고 하는 판이다. 이러한 '반국가적 반민족적' 역사상이 이제 이른바 뉴라이트의 지도부가 되어 '치열한 사상전'을 표방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을 주장하는 전도된 기막힌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한국에서 우익을 자처하는 집단은 유독 민족ㆍ국가의식이 취약하다. 적대적 반북(反北)정서가 근간이다.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게 마련인 우익 논리대로라면 일본과 한국의 우익은 손잡을 수 없거늘 반북정서를 지렛대로 일본의 극우집단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기현상도 드러낸다. 3ㆍ1운동 88주년을 맞아 '상식'을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이다.